오피니언 사설

미군 철수가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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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이 주한 미 2사단 병력 중 4000여명을 이른 시일 내에 이라크로 파견하겠다고 최근 우리 정부에 통보했다. 지난해 3월부터 흘러나왔던 주한미군 감축설이 마침내 현실화한 것이다.

서울 진입 통로를 방어해온 미군 전투병력이 빠져나가게 됨으로써 이제 안보문제는 도상(圖上) 차원이 아니라 긴급대처해야 할 실제 상황으로 급변했다. 미군을 대체할 한국군 부대를 차출하고 전력을 보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간다. 2사단이 보유한 장비 확보 비용만도 최소 50억달러 이상이 든다는 추계도 있다.

특히 미군 철수는 국내외 기업의 투자에 부정적 영향을 미쳐 가뜩이나 어려운 우리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주식값의 폭락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상황이 이런 만큼 정부는 안보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은 무엇이고, 감당할 역량은 있는지 개괄적인 그림이라도 빨리 국민 앞에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불안감이 그나마 진정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 사태가 악화하는 데 따른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이 중장기적 과제였던 '주한미군 감축'이라는 카드를 앞당겨 쓴 것은 현 정부 들어 누적된 양국 간 불협화음도 한몫 했다고 본다.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갈등이 대표적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한.미 정부의 향후 태도다. 양국은 이번 사안과 관련해 사전 협의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유감스럽다. 동맹관계가 이렇게 냉랭하게 변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이 정권은 잘 알 것이다. 아쉬운 쪽은 우리다. "갈 테면 가라"고 한다면 그 다음의 대책이 있느냐가 문제다. 미군의 감축은 대북 상황과 재정적 부담을 감안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와 속도로 추진돼야 한다. 철수를 기정사실화한다 해도 그 점에서 미국과 좀더 긴밀한 유대를 가져야 한다. 정부는 '향후 10년 내 자주국방' '협력적 자주국방' 등 수사(修辭)가 아니라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