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냐 간디, 식당종업원에서 총리되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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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국회의 의원인명록은 소냐 간디(57)의 학력에 대해 '영국 캠브릿지 대학에서 공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캠브릿지 대학은 재학생 명부에 '소냐 마이노(Sonia Maino.결혼 이전 본명)'란 이름은 없다고 밝혔다.많은 인도인들은 소냐를 캠브릿지 출신으로 알고 있으며,소냐의 측근들은 캠브릿지 대학의 발표에 대해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국 더타임스 17일자에 따르면 실제로 18살의 이탈리아 소녀 소냐가 다닌 곳은 캠브릿지의 영어 학원인 벨 스쿨이었다.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어학원에서는 외국인을 위해 6주 과정의 '영국문화 소개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이 과정을 마치면 디플로마(이수증)를 주었다.소냐는 그나마 이 과정도 잠깐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대신 베이비시터와 식당 종업원으로 용돈을 벌었다.그녀는 캠브릿지의 그리스 식당에서 일하던 때 라지브 간디를 만났다.라지브 간디는 인도의 초대 총리인 네루의 외손자.그는 집안의 영향력 덕분에 캠브릿지 대학에서도 최고 명문인 트리니티 칼리지에 공학도로 진학했다.그러나 공부에 별 취미가 없던 간디는 학교를 중도에 포기했다.두 사람은 3년간 연애 끝에 결혼했다.

미남.호남형 귀족 간디를 처음으로 본 순간 소냐는 "첫 눈에 반했다"고 고백했다.그러나 당시 소냐는 인도에 대해 "뱀과 코끼리가 사는 먼 나라"라는 정도밖에 알지 못했으며,간디 집안의 명성도 전혀 몰랐다.결혼후 인도를 찾은 소냐는 전혀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혹독한 마음 고생을 했다.그 과정에서 시어머니(인디라 간디 전 총리)를 존경하는 한편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동시에 키웠다.

그래서 남편의 정치 입문에 절대 반대,"차라리 애들을 데리고 길거리에 나가 동냥해 먹고살겠다"고 호소하기도 했다.그러나 결국 남편은 간디 가문의 명성에 밀려 정치에 입문했다.소냐는 남편이 인도 총리가 되기 1년전인 1983년 인도국적을 취득했다.우려했던대로 남편은 어머니에 이어 1991년 테러에 희생됐다.국민회의는 라지브 간디의 암살 다음날 소냐를 당 총재로 선출했다.소냐는 "정치를 절대 않겠다"며 나서지 않았다.

이후 소냐가 정치판에 나서기까지 7년은 간디 가문이라는 명성과의 싸움이었다.내성적인데다 힌두어에 서툴어 외부에 나서길 싫어하는 소냐는 그동안 '모나리자'란 별명을 얻었다.뭐가 뭔지,아는지 모르는지,그저 애매한 미소만 짓고 있기 때문이다.BJP에 참패를 거듭해온 국민회의는 끈질기에 그녀를 설득했다.인도와 국민회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며.실제로 설득은 주효해 예상 외의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그녀의 집권에 따른 우려도 적지 않다.소냐 스스로는 유세 과정에서 시어머니 인디라 간디를 연상케하는 옷을 입고 비슷한 말투로 간디 가문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그러나 소냐는 여전히 외국인이다.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소냐는 지금도 가톨릭을 믿고 있다.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다.힌두어로 남을 설득할 정도의 연설을 하지 못한다.무엇보다 지금까지의 정치혐오로 아무런 공직을 맡아본 경험이 없다.오로지 간디 가문에 시집왔다는 이유만으로 총리가 된 셈이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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