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82>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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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16면

한국시리즈 5차전으로 필름을 돌린다. 0-0으로 팽팽한 7회 초였다. 마운드의 김선우(두산)에게서 조금씩 힘겨운 표정이 읽혔다. 투구수가 100개에 이르고 있었다. 이 경기를 놓치면 내일이 없다는 절박함이 그를 지탱해 주고, 몸에는 없는 어떤 에너지를 만들어 주는 것처럼 보였다.

김경문, 경기는 놓쳐도 선수는 지킨다

1사 만루의 위기가 찾아왔다. 김재현, 최정, 나주환이 볼넷과 몸맞는공으로 나갔다. 타석에 정근우(SK). 힘겨운 상대였다. 실점이면 승부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 수 있었다. 그 순간 ‘인사이드’의 시선은 자꾸만 김경문 감독을 찾았다. 그가 “타임!” 하고 외치며 걸어 나올 것 같았다. 7회가 시작될 때, 선두타자 김재현이 출루했을 때, 1사 1, 2루가 됐을 때, 모두 투수교체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감독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김선우의 투구수가 100개를 넘겼다. 정근우와 8구까지 가는 접전이 이어졌다. 짧은 좌익수 플라이. 3루 주자가 홈을 파고들 수 없는 거리였다. 김선우의 볼끝이 살아있었다. 2사 만루가 됐다. 이때도 교체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경문 감독의 선택은 여전히 ‘김선우로 간다’였다. 박경완의 타구는 조금 강한 땅볼이었지만 정면. 그 타구가 3루수 김동주의 가슴팍을 맞고 튀었다. SK로서는 행운, 두산으로서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균형이 깨지고, 김선우가 마운드를 이재우에게 넘겼다. 투구수 112개, 6과3분의 2이닝 1실점. 포스트시즌에서 1선발로 네 번 등판한 그의 최다투구수였고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는 정규시즌 21번의 등판에서 딱 한 번 더 많은 공(116개, 9월 13일 KIA전)을 던졌다. 한마디로 올해 김선우 최고의 투구였다. 그래서 시즌 6승7패, 포스트시즌에서 1승도 못 거둔 김선우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잘 던졌다”였다.

경기가 끝나면 늘 남는 투수교체에 대한 미련. 그때 왜 김선우를 미리 바꾸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불펜의 힘으로 포스트시즌을 꾸려간 두산이었기에 더 그랬다. 그날 경기를 TV로 함께 본 박찬호도 그렇다고 했다. 마침 박찬호가 김경문 감독을 만났고, 그 이유를 물어 전해줬다. 대답은 이랬다.

“그때 선우를 바꾸면 또 한번 선우의 기를 꺾는 것 아닌가.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잘 던졌고, 그 느낌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그 경기를 놓칠 수는 있어도 선우는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대답에 올림픽 대표팀의 이승엽이 떠올랐다. 김경문 감독은 그때 부진에 빠졌던 이승엽을 교체는커녕 단 한번도 타순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병살타와 삼진을 거듭하던 이승엽의 결과는 어땠나. 한·일전 역전홈런, 쿠바전 결승홈런이 그 믿음에 대한 메아리였다.(여기서 한기주의 케이스를 떠올린다면 눈치 빠른 야구팬이다. 한기주의 경우 메아리는 없었지만 김 감독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기회를 줬다고 본다.)

김선우-이승엽-한기주의 케이스에서 공통점을 얻는다. 김경문 감독이 이기는 것보다 먼저 사람을 향한다는 거다. 그는 그날 한국시리즈 5차전을 잃었지만 김선우라는 에이스를 얻었다. 그렇게 얻은 선수에게는 자신감이 보태진다. SK 김성근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두산을 이렇게 평가했다. “두산은 발이 두렵다. 빨라서 두려운 게 아니라 겁이 없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서 두렵다”라고. 그렇게 얻어지는 도전정신과 자신감. ‘강한 두산’을 만든 김경문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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