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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파도가 기른 바다의 여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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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16면

클레어 르로이가 이끄는 ‘머메이드 세일링팀’이 해운대 앞바다를 유영하고 있다.

주말의 해운대 앞바다엔 꽃바람이 불었다. 10월 28일부터 6일간 항도 부산을 뜨겁게 달군 세계여자매치레이스요트대회는 아시아에서 처음 열린 세계요트연맹(ISAF)의 ‘그레이드1’ 여자대회였다. 수면에서 튕겨 나온 따가운 가을볕이 쪽빛 바다를 은빛으로 수놓는 가운데 하늬바람에 한껏 부풀어오른 새하얀 세일(Sail)과 금발머리를 나부끼는 이국의 세일러(Sailor)들 몸짓이 아롱져 이뤄내는 이미지는 그림처럼 선명했다.

매치레이스는 아메리카스컵과 마찬가지로, 같은 디자인의 요트를 타고 4명 이상의 선수들이 한 팀을 이뤄 일대일 방식으로 스피드를 겨루는 경기다. 부산세계여자매치레이스대회(부산시·부산시요트협회 주최)는 9개국에서 11개 팀이 참가해 열띤 경쟁을 벌였다. 특히 스키퍼(Skipper·선장) 순위로 세계랭킹 5위 이내의 선수 중 4명이 한국을 찾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프랑스의 클레어 르로이는 단연 돋보였다. 르로이는 2005년 5월 이후 줄곧 세계랭킹 1위를 지키고 있는 선수로 지난해에는 ISAF에서 수여하는 ‘롤렉스 올해의 월드세일러’에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세계여자매치레이싱협회(WIMRA)는 홈페이지에 제공한 뉴스를 통해 그를 ‘언터처블’ 스키퍼라고 표현했다.

초속 8~9노트의 적당한 바람 속에 열린 지난 2일 파이널매치의 세 번째 플라이트(Flight·게임). 르로이는 예상외로 세계랭킹 5위 샐리 바코(미국)에게 플라이트 스코어 2:0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한 게임을 더 지면 3:0으로 대회 우승컵을 넘겨줘야만 하는 상황. 르로이는 이전 2게임에서와는 달리 출발선상에서부터 일찌감치 바코를 따돌리고 앞서가고 있었다.

클레어 르로이

그러나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1마크 지점을 돌아 뒤 바람을 받기 위해 스피네이커(Spinnaker·요트가 뒤 바람을 받아 나아갈 때 펼치는 여분의 큰 돛)를 펼친 순간 갑작스러운 돌풍에 의해 세일이 두 조각 났다. 바람을 등지고 들어올 때 스피네이커는 요트가 속도를 내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세일이 찢어진다는 것은 모터보트의 엔진이 고장난 것과 다름없다.

결국 승리는 미국 팀에 돌아갔고, 르로이는 WIMRA 투어 중 다섯 번째 우승 기회를 놓쳐 버렸다. 두 번째 게임에서는 ‘주최 측이 출발 신호 깃발을 잘못 올려 게임에 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그녀의 표정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스물여덟치고는 꽤나 천진난만한 얼굴로 ‘이기고 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겠냐’는 표정이었다.

“엄파이어(심판)의 판정이 애매했다고 생각하지만 파이널에 진출해 바코 선수와 멋진 경기를 치른 것만으로 만족한다. 아침에는 바람이 썩 좋지 않았지만, 오후 들어 적당한 바람이 불어줬고 내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우아한 금발 미녀, 가까이서 보니 새까만 선글라스 아래 깨알 같은 주근깨가 내려앉아 ‘말괄량이 삐삐’가 나타나 말을 거는 것만 같다. 오뚝한 콧날과 가늘고 긴 눈썹은 프랑스 여인 특유의 매력이 묻어나고, 체격에 비해 넓은 어깨와 남자 못지않은 허벅지 두께에는 ‘갯바람 좀 맞아본 마도로스’의 연륜이 배어 있다.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도 처음 왔는데 해운대 비치를 품은 부산은 정말 멋진 도시다. 유럽에 못지않은 요트 환경을 갖추고 있다”며 세계랭킹 1위 선수로서의 격려도 잊지 않았다.

르로이는 11번의 WIMRA 투어 중 일곱 번 대회에 참가해 네 번 우승, 두 번 준우승이라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성과를 거뒀다. WIMRA의 회장이자 세계랭킹 4위의 세일러 리즈 베일리스(미국)는 “르로이는 전술적으로 뛰어난 스키퍼로서 현재 최고의 팀을 이끌고 있다”고 평했다. F1 레이싱으로 치자면 전성기 때의 미하엘 슈마허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 달 스페인에서 열리는 ISAF 총회 ‘올해의 월드세일러’에도 유력한 수상 후보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요트는 내 인생의 밸런스”
4년째 내리 세계랭킹 1위를 고수하고 있다면 ‘이 친구 밥 먹고 요트만 타겠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르로이는 직장인이다.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이 함께 일하는 마케팅 컨설팅 회사에서 회계를 담당하고 있다. 프랑스는 아마추어든 프로페셔널이든 세계대회에 나가면서도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일을 하면서도 요트를 즐길 수 있단다.

“어렸을 적부터 늘 오빠와 함께 놀며 컸는데, 우리는 에너지가 넘쳐 나는 남매였다. 내가 아홉 살 때 아빠는 우리를 요트스쿨에 보냈는데, 최소한 요트를 타고 온 주말에는 곯아떨어져 집안이 조용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또한 요트 오너였으며, 할아버지를 포함해 대대로 고향 생케포트류에서 배를 가진 선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세일링을 배우게 됐다. 하지만 10대 시절에는 요트 선수 생활을 하지 않았다.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었고, 취미로 배운 요트로 밥벌이를 할 생각은 없었다. 가족과 함께 일하며 주말에 요트를 즐기는 것이 더 즐겁다.”

르로이는 지난해 ‘올해의 선수상’ 시상식에서 “요트는 재미와 경쟁은 물론 나의 영어 실력을 키워 주는 최고의 길이었다”고 재치 있는 수상 소감을 밝힌 바 있다. 그것 때문인지 ‘이 친구에게 요트는 어떤 의미일까’ 다소 추상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어졌다.

“요트는 내 인생의 밸런스다. 직장에서 일을 하고 나면, 바다에 나갈 생각에 에너지가 샘솟는다. 에너지가 넘쳐날 때 세일링을 즐기고, 그 에너지를 바탕으로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 투어를 다니는 것 또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오빠와 더불어 어릴 적 많은 날들을 바다에서 보냈고, 더불어 인생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바람과 함께 바다와 함께 부대끼면서 말이다.”
이번 달 ISAF 총회에서 르로이가 2년 연속 ‘올해의 선수’에 꼽히게 된다면, 또 어떤 소감을 밝힐지 꽤나 궁금하다.

2012년 런던올림픽부터 정식 종목
WIMRA가 주최하는 여자매치레이스투어는 아직까지 큰 규모의 스포츠 이벤트는 아니다. 아직도 아마추어대회와 프로대회가 혼재해 열리며,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요트 저변을 갖고 있는 일본에서도 여자 프로팀은 많지 않은 형편이다. 이번 부산대회에는 우승팀에 2만5000달러의 상금이 걸려 있었는데, 여자대회로는 꽤 많은 금액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는 2012년 런던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앞으로 새로운 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이번 부산대회의 총감독이었던 피터 레지오(뉴질랜드)는 “남자 매치레이스가 아직 (올림픽에) 포함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자 종목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선보인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서도 매치레이스 종목이 대중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부산대회에는 한·중·일을 포함해 인도 팀까지 아시아에서 네 팀이나 참가했다.

한편 이번 대회에 출전한 우리나라 매치레이싱팀은 11개 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사실 우리나라는 남녀를 통틀어 매치레이스 세일링팀이 상시적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다. 이번 대회에도 대학이나 실업팀에서 딩기급 요트 선수를 모아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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