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유엔 사무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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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유엔 창설과함께 초대 사무총장에 선임된 트리그브 리는 1백10㎏을 오르내리는 거구였다.노르웨이의 법무.외무장관을 역임한 그의 총장선임 문제가 안보리에 올랐을 때 미국.영국.프랑스 등서방의 상임이사국들은 찜찜해 했다.거구답게 매사 에 신중하다는점에 대해선 신뢰감을 갖고 있었으나 오랫동안 스탈린과 매우 친숙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이 걸림돌이었던 것이다.결국 그의 장점을 선택한 서방측의 판단은 옳았다.
리는 유엔의 필요성과 목적을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그는 만약유엔이 약자에 대해 어떤 보호도 해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며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행동했고,그의 행동은 사사건건 소련의 눈밖에 났다.총장으로서 그의 진면목을 드러 낸 것이 6.
25동란 발발 직후의 안보리 소집이었다.그는 당시 소련이 중공의 유엔가입 문제로 이사회소집에 불응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한국에 대한 무력침공을 평화교란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대책을 통과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50년말 그의 임기가 끝나갈 때 연임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소련은 당연히 거부권을 행사했다.당시 자유중국을 포함한 4개 상임이사국이 초임 때의 추천을 유효한 것으로 밀어붙여 3년을 더 일할 수 있었거니와 그가 퇴임한 53년에 스탈린이 사망했고,한국전쟁도 막을 내린 것은 아이로니컬한 일이었다.
리의 경우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얽힌 인물은 거부권 탓에 그 자리에 앉을 수 없을 뿐더러 설혹 앉는다 해도 소신껏 일하기 어렵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3대 우 탄트 이래 매번 제3세계 출신들이 총장자리에 오른 것도,미국의 카터.영국의 대처.일본의 나카소네.캐나다의 멀로니 등 원수급 인사가 물망에 오르곤 했지만 모두 성사되지 않은 것도 그 까닭이다.
이번 신임총장 선출과정에서도 갈등은 여실히 드러났다.프랑스의거부권을 등에 업은 갈리 현총장과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코피 아난 사무차장의 대결은 결국 아난의 승리로 끝났으나 뒷맛은 개운치 않다.지난해 창설 50주년을 맞은 유 엔이.위기'에빠져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거니와 총장이 강대국들의 입김에 휘둘려져서야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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