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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이’ 카드로 어르고, 오랜 친구 동원해 달래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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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08면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10월 30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미 재계회의’ 환영리셉션에서 윌리엄 로즈 씨티그룹 부회장과 환담하고 있다. 서울=뉴시스

명분을 주고 실리를 얻다
10월 11일 오후 5시 미 워싱턴의 국제통화기금(IMF) 회의실. IMF 총회 기간 중 긴급 소집된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가 열렸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의 기조연설 뒤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강 장관이 팔을 번쩍 들어 발언을 신청했다.

한·미 통화스와프 끌어낸 강만수 ‘협상의 기술’

“선진국의 문제가 신흥국으로 전이되고 있는데, 다시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 문제가 넘어가면 선진국들이 더 어려워진다. 이른바 역전이(Reverse spill-over)다. G7(서방 선진 7개국)만의 통화스와프로는 안 된다. 신흥국이 국제적인 공조체제에 포함돼야 한다.”

강 장관은 자신이 직접 작명한 ‘리버스 스필오버’라는 논리를 꺼냈다. 선진국에서 시작된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으로 신흥국들이 외환보유액을 쓸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 국채를 내다 팔면 미국 등 선진국도 피해를 보게 된다는 논리였다. 브라질·터키 등 다른 신흥국 재무장관들의 호응이 쏟아졌다.

강 장관은 만나는 사람마다 리버스 스필오버를 역설했다. 미국으로서도 수긍이 가는 논리였다. 신흥국의 위기가 미국으로 재전이되는 것을 막아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한국만을 도와달라는 ‘읍소’가 아니라 주요 신흥국과도 공조해야 한다는 어른스러운 구상이 미국의 입장을 한결 편하게 했다. 전통적으로 달러 우산 제공에 까다로웠던 미국으로서도 입장을 바꾸려면 명분이 필요했고, 리버스 스필오버가 그 명분을 제공했다.

다른 명분도 있었다. 재정부 실무진은 국내에 진출한 외국 은행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일본이 미국과의 스와프를 통해 확보한 달러 중 상당 부분을 일본 내 미국계 은행에 풀고 있다는 점도 참고가 됐다. 재정부 협상팀은 “한국이 어려워지면 한국 시장에 나와 있는 미국계 은행과 투자자들도 곤란해진다”며 미 재무부 실무진을 설득했다. 냉랭하던 미 재무부에 미묘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노련하게 아픈 곳 건드리다
강 장관은 미국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인 9일, 미국의 유력 신문인 워싱턴 포스트와 인터뷰를 했다. 한국 경제에 탈이 났다는 보도가 줄을 잇자 상황을 알아보러 워싱턴 포스트 도쿄지국장인 블레인 하든이 서울로 날아왔다. 강 장관은 직설적으로 미국발 금융위기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파생 금융상품과 헤지펀드들이 카지노 도박 같다. 많은 한국인은 미국이 어떻게 그토록 취약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세계 경제의 맹주면서도 유례 없는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되고 만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그대로 건드린 것이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거론하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12일 오전 10시30분 미 워싱턴의 페어몬트 호텔.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의 토머스 번 부사장 일행과 강 장관이 마주 앉았다.

번 부사장 일행이 한국의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에 대한 질문을 쏟아낼 참이었다. 하지만 강 장관이 선수를 쳤다. “먼저 질문할 게 있다. 국제적인 투자은행들이 이런 사태를 맞을 때까지 당신들은 어떤 경고를 했는지 알고 싶다.” 정색은 안 했지만 아픈 곳을 찌르는 질문에 무디스 측 관계자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뒤 무디스 관계자가 “우리도 상상을 못했다”고 짧게 대답했다. 강 장관이 말을 받았다.

“한국 경제도 그런 점에서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일종의 기선 제압이었다. 이어 강 장관은 은행의 건전성, 외채 구조, 외환보유액 등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강 장관의 면담은 성공적이었다. 이날 무디스는 물론이고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도 한국의 신용등급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씨티그룹과 20년 인연
13일 오후 뉴욕행 기차에 오른 강 장관은 마음이 무거웠다. G20 재무장관 회의와 IMF 총회의 성과는 불투명했다. 9월 18일 미국이 일본·영국 등 5개국과 통화 스와프 계약을 하는 것을 보고 은밀하게 추진하기 시작한 통화스와프 프로젝트는 별 진전이 없었다.

14일 오전 10시 강 장관은 숙소인 헴슬리 호텔에서 윌리엄 로즈 씨티그룹 부회장과 로버트 루빈 씨티그룹 고문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한국과 특별한 친분이 있었다. 11년 전 외환위기 당시 루빈 고문은 미 재무장관이었다. 그는 막후에서 한국에 대한 IMF 구제금융 과정과 단기외채 만기 연장 협상 과정에 깊이 간여했다. 로즈 부회장은 외채 만기 연장 협상 당시 우리 정부가 심사숙고해 고른 협상 사회자였다. 만기 연장은 IMF 구제금융 후에도 위기가 계속되던 한국 경제의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 로즈 부회장은 냉정한 채권단을 어르고 달래가며 합의를 이끌어냈다.

강 장관이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현재의 금융위기는 G7만의 공조로는 안 된다. 한국이 미국 국채를 팔면 미국에도 손해가 간다”며 통화스와프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루빈 고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 장관이 다시 호소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한다. 씨티은행은 두 번이나 한국이 어려울 때 도움을 줬다. 늘 고맙게 생각한다.”

사실 씨티은행과 한국 경제 사이엔 오랜 인연이 있다. 73년 1차 석유파동 때 한국은 달러가 절실했다. 그때 한국에 차관을 제공한 곳이 씨티은행이었다. 한국 정부는 87년 씨티은행에 25개의 지점을 허가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자 존 리드 씨티은행 회장은 강만수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에게 사람을 보내 “우리는 한국에 대한 약속을 다할 준비가 돼 있다(We are ready to do all commitments to Korea)”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해외 금융기관들이 한국을 외면하던 암흑기에 등장한 첫 지원군이었다. 로즈 부회장이 다음해 뉴욕 외채협상에서 우리 정부 요청으로 사회를 맡아 협상 타결에 노력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다시 헴슬리 호텔. 로즈 부회장이 말을 꺼냈다. “마침 티모시 가이스너 뉴욕 연방은행 총재와 점심을 하는데 이야기를 전하겠다.” 일이 풀리려고 해서일까.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2인자인 가이스너는 루빈·로즈와 가까운 사이였고, 한국과의 인연도 깊었다. 그는 외환위기 당시 미 재무부 부차관보로 루빈 장관과 손발을 맞춘 인물이었다. 로즈와 가이스너 총재 간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다. 로즈는 이날 점심식사 뒤 바로 강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10~12일 안에 답이 나올 겁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비관적이던 한·미 통화스와프에 서광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달러 우산’이라는 한·미 통화스와프의 위력은 대단했다. 금융시장은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씨티그룹은 “한국의 부도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라고 평가했다. 강 장관은 31일 재정부 간부들과의 점심식사 자리에서 “9회 말 역전이 아니라 이제 게임이 시작되는 1회 초”라며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주문했다. 가라앉는 실물경기와의 힘든 싸움이 아직 강 장관 앞에 놓여 있다.



강만수 장관의 ‘한·미 통화 스와프’ 추진 미국 동선

10월 11일(토)
10:50 인천공항 출발
11:10 워싱턴 DC 덜레스 공항 도착
16:30~17:30 한·일 재무장관 회의
18:00~19:30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19:45~20:00 IMF 총재 면담

10월12일(일)
10:30~11:00 무디스사 면담
13:30~14:00 S&P사 면담
15:30~16:00 호주 재무장관 면담(*하루 전 갑자기 취소)

10월 13일(월)
11:37~11:43 IMF총회 기조연설
15:00~18:00 뉴욕으로 이동(기차)

10월 14일(화)
09:00~09:30 스티븐 로치 모건스탠리 아시아 회장 면담
10:00~10:30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윌리엄 로즈 씨티그룹 부회장 면담
15:30~16:15 존 윈컬리드 골드먼 삭스 사장 면담
16:40~17:10 헨리 페르난데스 MSCI 사장 면담

10월 15일(수)
07:30~09:00 주 유엔대사, 뉴욕 총영사 조찬
14:00 뉴욕 출발

10월 16일(목)
17:25 인천공항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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