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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사업가' 놔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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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경제는 어려운데 말 '풍년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재경부.공정위.금감위.노동부 등 경제부처마다 높은 사람들이 나서서 "이게 경제해법"이라고 한마디씩 다 한다. 이뿐 아니다. 다수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같은 당 안에서도 여러 사람이, 여러 이야기를 한다. 여기에 한나라당과 총선 후 위상이 급부상한 민노당 관계자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세상이다.

높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 정부 시책에 민감한 기업이나 금융회사들은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주제는 대체로 '성장이냐, 분배냐'다. 지금 중소기업.영세 상인들은 끝모를 경기침체에 숨이 막힐 지경인데 당국자들의 논의의 수준은 고상하기만 하다.

이들의 발언을 보면 상당수가 개혁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개혁없이는 성장도 안 된다'는 오묘한 논리도 나온다. 특히 대기업이 주로 도마 위에 오른다. 공정위가 최근 전격적으로 입법예고한 '대그룹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축소' 등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이런 가운데 기업에 대한 반 기업정서는 은연중 높아만 간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소가 지난 4일 발표한 '2004년 국가경쟁력 평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조사 대상 60개국 중 35위를 차지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귄위가 있다는 이 조사에서 우리가 그나마 중위권을 유지한 것은 정부가 잘해서가 아니다. 정부의 경제운용 성과 부문은 49위에 머물렀지만 기업 개혁 마인드(3위), 경영진의 국제경험(5위) 등이 높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이게 우리의 현주소인데 정부가 기업 개혁을 말하는 것은 마치 꼴찌가 우등생을 가르치려는 것과 유사하다. 기업도 여러가지 개혁을 할 게 많겠지만, 그보다 시급한 게 정부 개혁이라고 본다.

진정한 개혁을 위해선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 몇명인지 파악조차 안되는 경제 투기꾼.사기꾼.협잡꾼들 문제다.

'회장.사장'명함을 찍어갖고 다니지만 회사는 유령회사 비슷하고, 종업원이 거의 없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 바도 없고, 오로지 투기에만 관심갖는 '졸부군(猝富群)'이다. 어디 목좋은 빌딩이나 땅살 데 없나, 한탕 하고 빠질 주식 없나 찾는 데 하루를 보낸다. 부동산값 상승을 즐기면서 터무니없이 임대료를 비싸게 물려 세들어 사는 사무실.상가 사람들의 뼈를 휘게 하는 무리다. 이런 사람일수록 점심을 뭘 먹을지, 낮엔 어떤 사우나에 갈지, 저녁은 어떻게 근사하게 한잔 할지에만 관심있다고 한다. 세금을 제대로 내는지도 모르겠다. '제조업은 귀찮다'며 접고 부동산 사들여 부자된 사람들에 대해 어떤 실태조사가 이뤄졌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어쩌다 서울 강남 쪽에 가보면 경기가 나쁘다는 말이 실감이 안 갈 정도다. 온통 호화 음식점.술집.여관.사우나 판이다. 이런 행태가 빈부격차와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는 것이지, 열심히 수출해 달러를 벌어들이는 몇몇 대기업이 빈부격차를 키우는 게 아니다. 공장은 이틀에 하나 꼴로 줄어 들고, 그 자리엔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선다. 상가엔 맨 복덕방만 생긴다. 이러면 우린 앞으로 뭘 먹고 사나.

기업들은 이제 지켜보는 눈이 많아 움치고 뛰기도 힘들다. 국세청.공정위.금감위 등 각종 감독기관뿐 아니라 시민단체.소액주주.정당 등이 눈에 불을 켠다. 투명하지 않으면 생존을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정경유착.특혜성장의 시대는 완전히 갔다. 따라서 기업들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윤리경영.투명경영을 정말 잘 해야 한다. 하지만 개혁 대상 1순위는 '사이비 사업가'들이다. 다음은 정부이고, 기업은 그 다음이어야 순서에 맞는다고 본다.

민병관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