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리뷰>영화 "세 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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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가난의 흔적처럼 거친 솜씨로 툭툭 붙여놓은 오톨도톨한 시멘트담벼락에 기대어 「삼겹」은 하품을 하고 있다.무릎이 해진 청바지를 입고 「무소속」은 삐딱하니 담배를 꼬나물고,「섬세」는 팔짱을 낀 채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스무살의 스틸 사진.
다른 아이들이 대학으로,사회로 착착 인생의 프로그램을 진행해나갈 때 낙오자가 된 세 친구들에게는 아무런 길도 준비돼 있지않았다.모든 걸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되 어느 것 하나 실행할 권리도,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스산한 청춘 의 시간을 그들은 그냥 죽이고 있었다.
올해 본 가장 슬픈 절망의 영화,가장 사실적인 한국의 청춘영화는 이 지루한 시간의 순례기다.하고많은 날 낮술에 취해 고함을 질러대고 식구들을 닦달하는 아버지.바둑말고는 도통 관심이 없는 아버지.생활에 지쳐 금세라도 쓰러질 것같은, 또 일에 치여 무신경한 어머니.밖에서 어린 소녀의 주머니를 털고 본드를 부는 누이,몰래 포르노비디오를 빌려보는 동생.학교는 마쳤지만 생에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다.
여기서 감독은 새삼스레 가족 사이에 놓인 틈의 너비에 주목하지 않는다.대신 카메라를 인물의 내부로 돌리고 균열의 간극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무심한 시선을 잡는다.
고개를 돌리면 집 바깥에서는 조롱과 억압의 얼굴이 세 친구를바라본다.세상은 비아냥거린다.비대하고 게으른 삼겹과 마르고 여린 섬세는 비정상이다.그들은 지나치게 둔하거나 예민하다.세상의빈정거림은 둔하고 예민한 감성이 뚫고 나가기에 는 너무도 완강한 근육질을 하고 있다.
무소속도 비슷한 처지다.일본만화를 표절하는 현실이나 강압적인명령에 순응하기엔 그는 지나치게 순진하며 자존심이 강하다.우리사회와 제도는 이 지나친 정신과 육체를 외면한다.이때 외면은 단순히 소외가 아니다.파괴다.섬세와 삼겹이 퀭 한 눈을 하고 활력없이 옥상에 앉아있는 장면은 파괴된 청춘의 한 절정이다.
임순례 감독은 이 모든 아픔을 느림의 미학으로 다룬다.화면은언성을 높이지 않고 초라한 골목과 지친 거리를 되풀이해 훑는다.석양마저 메말라보이는 옥상,건조한 일상 너머로 서서히,누구도위무하거나 받아들여주지 않는 스무살 이방인들의 꿈이 드러난다.
획일주의라는 육중한 무게가 잔인하게 짓누르고 있는 세 친구의 꿈이. (영화평론가) 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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