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를움직이는사람들>37.거평그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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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새한종금의 입찰날인 지난 5일.
이날 아침 거평그룹 나승렬(羅承烈.51)회장의 집무실로 그의장조카인 나선주(羅善柱.36)기획조정실장이 바쁜 걸음으로 들어왔다. D사등 입찰경쟁업체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羅회장이 마지막으로 입찰정보를 점검하고 입찰금액에 대한 최종 조율을 하는 자리였다.
이날 입찰은 1천4백50억원을 써낸 거평에 낙찰됐다.이는 지금까지 거평이 사들인 대한중석등 9개업체중 가장 큰 인수금액.
재계는 다시 한번 거평의 「괴력」에 주목했다.거평이 인수한 9개업체에 들어간 돈을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4천억원 규모에 이른다. 그러나 실제 거평이 지불한 돈은 이에 훨씬 못미친다.재계일부에서 거평의 잇따른 기업인수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에 대해거평측은 『좋은 달걀을 고르면 부화를 잘 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로 설명한다.기업인수가 또다른 기업인수의 밑천 (부화)이 된다는 것이다.인수회사중 거평(옛 대동화학)을 제외하면 모두 「좋은 달걀」을 골랐다는 것이 그룹의 판단이다.이같이 기업인수등 그룹적 차원의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羅-羅라인(나승렬.나선주)」이 어김없이 가동된다.
특히 자금과 관련한 문제는 이 그룹의 최고의사 결정기구인 「6인회의」에서도 줄거리가 논의되지만 최종 결정은 「羅-羅」라인의 몫이다.
羅회장의 「베팅력」은 중견그룹 사이에선 정평이 나있다.「부화」가 잘될 것같은 회사는 남보다 돈을 더 써 사들이는 것이 그가 내세우는 「잣대」의 크기다.
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한 학력인 그는 경리학원과 중소업체에서 익힌 경리솜씨가 공인회계사 못지않다고 한다.
기업인수대상 업체의 회계장부도 그의 검색과정에서 저울질되며 그의 판단은 아직 큰 실수가 없었다고 한다.전남 나주가 고향인그는 6.25때 아버지를 여의고 궁핍한 가정속에서 자라 어릴적엔 끼니걱정을 밥먹듯 했다고 한다.18세때 무작 정 상경해 막노동판과 리어카 채소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중 羅회장은 제대로 장사를 한번 해보겠다고 결심하고 경리학원에 다녔고 주경야독으로 밤샘공부를 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본 학원강사가 한국전자라는 중소업체에 추천해 경리 실무를 쌓았다. 이후 삼강산업이라는 중소업체의 연말결산을 맞춰준 것이 인연이 돼 그 회사에 스카우트됐고 대졸간부들을 제치고 29세에 경리부장 자리에 올랐다.
羅회장은 이때 「기업경영은 돈관리가 생명」이라는 경영철학을 몸으로 체득하게 됐다.그래서 자금관리만큼은 「남」에게 맡길수 없다는 입장은 변함없는 그의 지론.
羅회장은 79년 중소건설업체인 금성주택(거평건설의 전신)을 세우면서 처음으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창업자금은 퇴직금과 저축한 돈을 합쳐 5천만원.80년대 중반부터는 부동산붐을 업고돈을 벌기 시작해 무명의 부동산업자에서 건설업계 의 다코호스로부상한다.
羅회장은 『지금까지 거평의 성장과정에서는 운이 80% 작용했다』고 말한다.80년대 후반 서울 강남지역에 집을 짓기만 하면팔려 뭉칫돈을 벌었고 기업을 인수하면 짭짤한 부동산이나 주식이딸려왔다는 것이다.
특히 94년 서울 동대문 옛 덕수중학교 부지를 사들여 대형 의류유통업체인 「거평프레야」를 짓기도 전에 분양을 마치고 1천억원에 가까운 순익(임대보증금 규모는 2천9백40억원)을 챙겼다. 이것이 종자돈 역할을 해 결국 대한중석(기계조립).한국시그네틱스(반도체).포스코켐(화학)등 굵직한 제조업체의 인수기반이 됐다.
그러나 거평은 초고속 기업확장으로 80년대 후반부터 세무사찰을 연중행사처럼 받았고 괴(怪)자금 파동이 터질 때마다 갖가지루머에 시달렸다.
羅회장은 『최근 1년동안 여러차례 괴자금이나 사채를 쓰라는 권유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돈을 잘못 끌어쓰다 다치는 기업이많아 남(다른 기업)과의 돈거래는 안하는 것이 철칙』이라고 말했다. 그는 『재무 부문만은 누가 뭐래도 우리 기준으로 가장 보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자부한다.심지어 『외상돈(어음)좋아하다가는 금방 망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羅회장은 『기업인은 과객(過客)』이라며 『기업을 운영하는 것자체가 사회환원』이라고 말한다.기업이 돈을 벌면 자연 그 이익은 조직원과 사회에 남겨지는 것이라는 뜻.
羅회장의 오른팔은 역시 羅실장(사장)이다.85년 연세대법대를졸업한 그는 현대자동차와 중견업체에서 3년동안 샐러리맨 생활을하다 거평건설이 질주할 무렵인 88년 羅회장의 부름을 받았다.
30세도 안된 나이에 「기획조정실장」자리로 들어와 羅회장의 경영파트너가 된 것이다.
그는 젊지만 대외교섭과 친화력이 뛰어나며 성격이 꼼꼼해 그룹의 하루 소요자금은 그의 사인이 있어야 집행될 정도의 결정권을갖고 있다.한국시그네틱스는 국내 ㈜D석판으로 다 넘어간 상태였으나 발표를 하루 앞두고 羅실장이 직접 나서 필 립스의 고위 경영진을 움직여 낚아채오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기획조정실장 외에 거평건설.중석건설.거평주택개발등 건설3사의 대표이사직을 겸하는등 폭넓은 역할을 하고 있다.거평은 건설3사 사장을 공채하려 했으나 적임자를 고르지 못해 결국 그가 사령탑을 맡았다.
「그룹경영 6인회의」의 멤버인 영입파 경영진의 핵심은 「羅-羅라인」외에 박석종(朴錫鍾.61.羅회장의 손위 처남)부회장,양수제(梁修濟.54)대한중석사장,염태섭(廉台燮.58)포스코켐사장,최의석(崔宜石.55)거평유통사장등이다.
서울대법대 출신인 朴부회장은 미국체류중이던 89년 그룹에 발을 들여놔 거평건설과 ㈜거평의 사장으로 경영일선에서 활약했다.
최근엔 계열사의 원자재 구매담당 총괄업무를 맡으면서 羅회장을 보좌하고 있다.
거평시그네틱스사장을 겸하고 있는 梁사장이 영입파 전문경영인중에선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그는 94년 그룹의 사장공채 1호로 합류해 그룹경영 골격을 갖추는데 일조했다.羅회장이 주요 경영사안이 있을 때마다 불러 의견을 묻는등 신임이 두텁다.
삼성전자 부사장을 역임했으며 중앙일보 부사장도 잠시 거쳤다.
廉사장은 63년 행정고시 1회 합격자로 정통 교통관료 출신.
그룹의 대정부업무의 창구역을 맡을 때도 있다.崔사장은 애경그룹에서 20여년동안 일하다 95년 영입됐다.羅회장과 삼강산업에서한때 직장생활을 같이한 인연이 있다.셈이 빠른 회계통으로 유통부문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引受군단'화합이 과제 거평그룹은 새한종금(자산 2조5천억원)의 인수로 그룹의 자산크기를 단숨에 4조원 규모로 끌어올렸다. 지난해 기준으로도 자산규모 재계랭킹 39위에 올라있어30대그룹안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 재계의 전망이다. 하지만 계열사의 대부분이 인수업체여서 이들 업체의 경영정상화란 숙제를 안고 있으며 이질적인 문화속의 여러 식구들의 화학적 결합도 과제다.거평이 이같은 장애물을 넘어 좋은 달걀을 잘부화시킴으로써 재계의 「혜성」이 아닌 「기린아」로 자리를 굳혀나갈지 재계는 주목하고 있다.

<고윤희 기자><다음은 동양화학그룹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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