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가을 드라마’ 다시 한번 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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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호 16면

지난해 10월 20일 일본 센트럴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2 스테이지 3차전. 요미우리 이승엽(32)이 2-3으로 뒤진 4회 타석에 들어섰다. 주니치 선발 나카타 겐이치의 오른손을 떠난 공이 이승엽의 머리를 겨냥한 듯 아찔하게 날아들었다. 이승엽은 몸을 빙글 돌려 공을 피한 뒤 나카타를 노려봤다. 이전 타석에서도 무릎을 파고든 투구가 2개나 있었기에 고의적 위협임을 확신했다.

일본 클라이맥스 시리즈 앞둔 아시아의 대포

갑자기 주니치 1루수 타이론 우즈가 끼어들며 “빈볼이 아니다”고 소리쳤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있던 이승엽은 우즈의 도발을 참지 못했다. 맞고함을 치며 난투극이라도 벌일 듯 우즈에게 다가갔다. 양 팀 선수들이 몰려나와 뜯어말렸지만 이승엽과 우즈는 서로를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소란은 5분 동안 계속됐다.
 
2008년을 건 승부
가을야구는 ‘전쟁’이다. 몇 경기만으로 우승을 가려야 하기 때문에 신체·두뇌·기술을 모두 쏟아내는 총력전이 펼쳐진다. 평소 위협구에 당하고, 발목을 밟혀도 참기만 했던 이승엽도 포스트시즌에선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우즈와의 마찰도 그래서 일어났다.

이승엽은 올가을에도 전쟁을 치른다. 왼손 통증으로 3개월 동안 2군에 머물렀던 고통, 베이징 올림픽 우승을 이끈 영광이 교차했던 2008년을 베팅한 승부다.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한 요미우리는 22일부터 도쿄돔에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2 스테이지(5전3선승제)를 벌인다. 상대는 한신과 주니치 중 제1 스테이지(3전2선승제·18~20일) 승자다. 여기서 이긴 팀이 챔피언 통합 우승팀을 가리는 일본시리즈에 진출한다.

이승엽은 1997년 삼성에서 프로에 데뷔한 후 지난해까지 무려 9차례나 포스트시즌을 뛰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에게도 올해만큼 절박한 가을은 없었다.

이승엽은 올해 정규시즌에 45경기밖에 나서지 못했다. 지난해 말 수술을 받은 왼손 엄지 통증이 남아 세 달 이상 2군에 머물렀던 탓이다. 그나마 1군 성적도 타율 2할4푼8리(153타수 38안타)·8홈런·27타점에 그쳤다. 일본 센트럴리그 최고 연봉(6억 엔)을 받는 ‘외국인’ 이승엽에겐 수술 후유증도 변명이 되지 못했다. 그의 자존심과 팀 내 입지 모두가 상처를 입었다.

이승엽은 “올해 팀에 기여하지 못해 많이 미안하다. 포스트시즌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기대치의 반도 채우지 못했던 2008년의 아쉬움을 가을에 만회하겠다는 각오다.

이승엽이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2 스테이지 3승을 주도한다면, 나아가 11월 1일 시작하는 일본시리즈(7전4선승제) 우승에 기여한다면 정규시즌 부진은 그저 ‘추억’으로 남는다. 길고 깊은 부진을 한 방에 만회해 온 이승엽 특유의 ‘쇼타임’이 또 한 번 연출되기를 바라는 이유다.

2009년을 기약한다
요미우리는 올 시즌 개막전 5연패를 시작으로 7월까지 하위권에 머물렀다. 리그 선두 한신과 최대 13경기 차까지 벌어졌다가 8월 이후 대반격으로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이승엽도 9월 14일 1군 복귀전에서 홈런을 때리는 등 이후 19경기에서 대포 7방으로 힘을 보탰다. 이승엽 복귀 후 요미우리 승률은 7할2푼2리(13승1무5패)에 이른다.

센트럴리그 사상 최대 경기 차 역전 우승을 이룬 요미우리의 분위기는 여전히 딱딱하다. 포스트시즌 제도 도입으로 리그 우승의 의미가 퇴색했기 때문에 요미우리는 일본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품지 못하면 ‘망친 시즌’으로 치부하고 있다.

요미우리는 지난해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도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2 스테이지에서 주니치에 3전 전패를 당해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요미우리 72년 역사상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축하 행사를 열지 않은 건 지난해가 처음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 회장은 “외국인 선수 싸움에서 졌다”며 독설을 내뱉었다. 홈런·타점 없이 11타수 3안타에 그친 이승엽을 향한 비난이었다. 이 말에 이승엽은 “왼손 통증을 참고 시즌 끝까지 뛰었다.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라며 서운해했다.

이승엽은 지난해 타율 2할7푼4리·30홈런·74타점을 기록했다. 2006년 타율 3할2푼3리·41홈런·108타점에 비하면 떨어지는 성적이었지만 상당수 전문가는 “부상을 참고 뛴 점을 감안하면 이승엽의 2007년은 2006년 못지않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요미우리는 지난겨울 야쿠르트에서 알렉스 라미레스를 연봉 5억 엔에 영입해 이승엽의 차지였던 4번 타자를 내줬다.

요미우리는 2002년 일본시리즈 우승 후 6년간 정상에서 멀어져 있다. 이번 포스트시즌 7승이 정규시즌 70승 이상으로 중요하다. 올가을에도 실패하면 요미우리는 또다시 ‘선수 쇼핑’에 나설 것이다. 이승엽에게 올가을은 내년 입지가 달려 있는 위기이자 기회다.
 
고전이 된 가을 드라마
김성근 SK 감독은 “이승엽은 10년 동안 한·일 모두에서 정상에 올랐던 선수다. 이번 포스트시즌 활약은 기술보다 마음에 달려 있다”고 전망했다. 누구보다 논리적으로 선수를 분석하는 김 감독이 추상적 얘기를 꺼낸 까닭은 뭘까.

김 감독은 일본 롯데에서 이승엽과 함께 있었던 2005년 포스트시즌을 예로 들었다. 당시 이승엽은 소프트뱅크와의 리그 챔피언전에서 타격감을 찾지 못했다. 폼이 무너져 4연타석 삼진을 당했고, 5경기 중 3경기에만 나서 9타수 1안타에 그쳤다.

그러나 며칠 뒤 한신과의 일본시리즈에서 그는 전혀 다른 선수가 돼 있었다. 1차전 홈런을 시작으로 시리즈 4경기에서 11타수 6안타(타율 5할4푼3리)·3홈런·6타점을 뿜어냈다. 이때 활약으로 일본야구는 이승엽을 재평가했고, 이듬해 명문 요미우리로 이적할 디딤돌을 만들었다.

김 감독은 “계산의 차이였다. 소프트뱅크 투수들은 이승엽의 예상과 반대로 공을 던졌지만 한신전에서 ‘패’가 풀리기 시작했다. 예측대로 공이 오면 이승엽을 당해낼 상대가 없다”고 전했다. 결국 이승엽이 자신과 팀을 짓누르고 있는 부담감을 어떻게 이겨 내고 좋은 감각을 유지하는지가 관건이다.

2000 시드니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처럼 이승엽의 포스트시즌은 막막한 위기와 극적 반전이 반복됐다. 이승엽이 삼성 시절인 2001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6경기에서 24타수 9안타(타율 3할7푼5리)·3홈런·6타점을 때린 것은 기억이 아닌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해 챔피언은 두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듬해 이승엽이 LG와의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동점 3점 홈런을 때려 삼성을 22년 만에 첫 우승으로 이끈 장면은 누구나 기억한다. 직전 타석까지 그는 홈런 없이 20타수 2안타로 극심하게 부진했지만 홈런 하나로 반전 드라마를 썼다. 일본 진출 후에도 2005년엔 위기-반전 구도를 만들었고, 지난해엔 반전 기회를 잡기도 전에 패퇴했다.

이승엽은 한국과 일본에서 지난해까지 포스트시즌만 총 52경기(23승29패)를 치르며 15홈런을 터뜨렸다. 침묵이 길어지면 속울음을 삼켰고, 한 방이 터지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고전이 되고 있는 이승엽의 야구. 훗날 팬들은 이승엽 드라마의 ‘2008년 가을판’을 어떻게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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