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빙자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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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57년 9월의 세칭 「가짜 이강석(李康石)사건」은 묘하게도 러시아 문호 고골리의 명작 희곡 『검찰관』과 매우 닮아있다.우선 두 주인공이 일정한 직업도 없이 떠도는 20대 초반의 청년이라는 점이 같고,지방의 고급관리들을 대상으로 벌 인 사기수법도 비슷하다.
한데 고골리가 지방 소도시를 작품무대로 삼은데는 까닭이 있었다.1830년대는 러시아 봉건사회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시절이었고,황제나 그 측근들의 이름을 들먹이기만 하면 안되는 일이 없었다.이런 현실에 착안해 씌어진 것이 『블라디미 르 삼등 훈장』이란 작품이었다.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고위층빙자 사기」를 소재로 삼은 것이었다.그러나 이 작품은 황제 측근의 압력으로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빛을 볼 수 없었고,무대를 옮겨 새로쓴 작품이 『검찰관』이었던 것이다.
1836년 이 작품이 초연(初演)되자 대중사회에서는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지만 권력자들이 「반동적인 작품」으로 지목하는바람에 고골리는 이탈리아로 피신해야 했다.흥미로운 것은 그로부터 얼마후 니콜라이 1세 황제가 이 공연을 관람 하고 나서 말했다는 다음과 같은 감탄사다.『모두들 멋지게 얻어맞았군.하지만제일 호되게 얻어맞은 사람은 바로 나로군.』 이 말로 미뤄 니콜라이 1세도 당시 자신을 빙자한 사기가 잇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던듯 하지만 문제는 당사자에게만 있는게 아니다.「가짜이강석사건」이나 『검찰관』에서 잘 나타나듯 관리들은 직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고위층빙자 사기 에 쉽게 넘어가는 속성(屬性)을가지고 있다는게 더욱 문제다.있을 법한 비행을 슬쩍 건드리기만해도 허겁지겁 돈봉투를 내밀고,직위를 높여주겠다는 조그마한 암시 하나에 간이라도 빼어줄듯 덤벼드는 것이다.
「문민」을 앞세운 새 정부가 들어선 뒤로는 자취를 감추지 않았나 했더니 청와대비서실의 국정감사자료에 따르면 3년6개월동안대통령 친인척및 청와대직원빙자 사건이 56건에 달한다고 한다.
도둑질도 그 대상이 있어야 하듯 속아넘어갈 사람 이 전혀 없다면 이런 사건은 발생할 수 없다.인허가.수주(受注)관련 사건이22건으로 가장 많다는 사실은 아직도 고위층만 들먹이면 안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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