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 시시각각

한반도 개조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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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세기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MIT 석좌교수)이 최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기억에 남는 말을 했다. “한국이 선진 경제강국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한 수 가르침을 청했더니 그는 ‘탈(脫)일본 모델’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그동안 한국은 일본을 성공적으로 모방해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는 일본과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모델로 제시한 나라가 스위스·핀란드·아일랜드였다. 작지만 강한 나라, 이른바 ‘강소국(强小國)’들이다.

  사실 그의 충고가 새로울 것은 없다. 한국 학자들 사이에 강소국론이 한때 유행했었다.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많아 북유럽 국가들과 아일랜드를 직접 취재하기도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를 넘나들면서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도 높은 이들 나라의 성공 신화는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취재 끝에 내린 결론은 강소국 모델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하긴 어렵겠다는 것이었다. 역사와 전통, 문화가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국가 규모에서 너무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강소국들의 인구는 대개 500만 명 안팎이다. 많아도 1000만 명을 넘지 않는다. 5000만 명에 육박하는 한국과는 큰 차이가 있다. “키가 큰 환자나 작은 환자나 의사의 처방은 같다”는 것이 새뮤얼슨의 반박이지만 솔직히 썩 와닿지는 않는다.

그래서 요즘 관심을 갖는 것이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의 ‘강소국 연방제론’이다. 인구가 많아서 강소국 모델을 적용할 수 없다면 나라를 쪼개면 될 것 아니냐는 역발상이다. 강소국처럼 효율적 운영이 가능한 인구 500만~1000만 명 단위로 나눠 최소한의 필수 기능만 중앙정부에 남기고 나머지 권한과 기능은 지방정부에 대폭 이양하는 분권형 연방제로 가자는 것이다. 50년 앞을 내다본 국가개조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 총재는 며칠 전 연세대 특강에서도 똑같은 주장을 했다.

외교·안보를 중심으로 연방정부는 국가 통합과 조정 기능을 수행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기능은 지방정부에 맡겨 자율과 경쟁 속에 각자 세계를 상대로 뛰게 하자는 것이 그가 말하는 분권형 연방제 개헌론의 요체다. 이를 통해 각 지방정부가 법규와 교육, 생활과 주거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투자 환경과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도록 만들면 한반도는 세계의 자본과 기술이 몰리는 글로벌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경쟁력 제고는 물론이고 망국적 지역주의와 이기적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차원에서도 강소국 연방제론은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뿌리 깊은 중앙집권적 전통에서 유래한 지역주의와 파당적 권력 싸움의 병폐를 해소하고, 자기 이익만 좇는 편협한 민족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한국은 일류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통일도 어렵다. 국수적 민족주의로 무장한 인구 8000만 통일 한국의 등장을 반길 주변국은 없다. 강소국 연방제는 통일 이후에 대비하는 효과도 클 것이다.

정부는 그제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지방행정체제 개편을 중점 과제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현재의 도·시·군 체제를 적당히 손질하는 정도로는 의미가 없다. ‘5+2’ 광역경제권 얘기도 나오고 있지만 이 기회에 헌법을 고쳐 본격적인 국가 개조에 나선다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현실적 난관과 부작용이 많다고 외면할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세력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고구려·백제·신라로 한반도가 쪼개졌던 삼국시대였다. 치열한 경쟁 속에 백제는 일본, 신라는 당나라, 고구려는 북방으로 뻗어나면서 가장 넓은 강역(疆域)을 지배했던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그 후 신라가 3국을 통일하고, 고려로 왕조가 넘어가면서 한반도의 영역은 크게 쪼그라들었다. 강역 자체를 넓힐 수 있는 시대는 아니지만 강소국 연방제는 동력이 떨어진 한국호의 로켓을 교체하는, 국운 상승의 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한국형 강소국 모델’이 아닐까 싶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