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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의 愚問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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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근 우리나라의 외교관계가 다변화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외교통상 상대국은 어디입니까?

보기:①미국 ②중국 ③일본 ④유럽연합(EU) ⑤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열린우리당 정책위원회는 최근 17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자를 상대로 정책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설문의 마지막에 등장한 문항이 외교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미 보도된 대로 열린우리당 응답자들의 63%는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상대국으로 중국을 꼽았다. 미국이라고 응답한 당선자들은 26%였다. 아세안이 5%, EU가 3%, 일본이 2% 순이었다. 며칠 뒤 똑같은 설문에 대해 한나라당 당선자 64%는 미국을, 33%는 중국을 꼽았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한국의 역사는 지난 수천년간 중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양국은 서로 끊임없이 부닥쳐 왔다. 다만 1945년 이후 92년까지 중국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전혀 없는 것 같았을 뿐이다. 따라서 지난 10여년간 급속도로 한.중 관계가 발전해 왔지만 양국의 역사적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다. 더구나 중국은 최근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다. 미국을 제치고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 됐고 우리가 가장 많이 흑자를 보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북한 핵 문제는 중국의 도움없이 풀어나가기 어렵게 돼 있다. 열린우리당 당선자들이 대부분 중국을 꼽은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마찬가지로 한나라당 당선자들의 압도적 다수가 미국을 꼽은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한국이 이만큼이나마 먹고 살게 되고 번영을 누리는 바탕엔 미국과의 동맹이라는 안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는 것을 남북한 모두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보듯 미국이 우리의 안전보장에 갖는 의미는 대단히 장기적이고 근본적이기까지 하다. 한국 경제의 발전에 미국이 직접적으로 기여한 것은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양쪽 당선자들의 응답은 일견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양쪽 다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설문결과를 토대로 한국 집권층이 미국과 일본에 두어 왔던 외교관계의 기본축을 중국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세포적이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당선자들이 역사교과서에 등장하는 구한말의 편가르기식 사고에 얽매여서도 안 되고 그럴 리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지난 100년을 헛살았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중국을 꼽은 63%의 열린우리당 당선자들이라 할지라도 한국의 대외적 관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아니 우리의 외교관계에서 중국이 미국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나라당 당선자들의 64%도 미국만 있으면 한국 외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집권당이 그런 설문조사를 했다는 사실 자체다. 어떻게 한국인의 생존에 직결된 고도의 외교적 문제를, 섬세하고 치밀한 사고를 요구하는 과제를 오지선다 단답형 문제로 만들어 설문조사하겠다는 발상이 가능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한.미동맹의 굳건한 토대 위에서라는 사족을 뒤늦게 달기는 했지만 경솔하기 짝이 없는 처사였다. 정작 집권당이 해야 할 일은 바로 한국 외교가 다섯개 문항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지 않도록 깊게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이재학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