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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의 자기 말 사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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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프랑스에서는 보통 양키들의 스포츠라고 폄하하지만 프랑스에도 야구를 즐기는 사람이 더러 있다. 최근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프랑스 방송에 야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운동경기의 특징은 룰만 알면 말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오히려 말을 알아들으면 야구 중계를 이해할 수가 없다. “너 죽었어(T’es mort)” “집으로 가(A la maison)” 하는 이상한 말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타자 주자가 1루에서 아웃되자 ‘아웃’이라는 말 대신 심판은 “너 죽었어” 하고 외쳤다. 홈런을 치면 주심은 “집으로”라고, 스트라이크 존에 공이 들어오면 “똑바른 공(droit)”이라고 말했다. 영어로 된 용어가 모두 프랑스어로 번역된 것이었다.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참 프랑스답구나’ 싶었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크로스’나 ‘프리킥’ ‘골’ 같은 용어는 물론 포지션도 모두 프랑스어로 바꿔 쓴다. 그 때문에 처음 프랑스에서 축구 중계를 보면 무슨 소리인가 싶다.

어린이 영어 교육용 만화 ‘도라’는 미국에 사는 히스패닉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재미있고 내용이 알차 한국 등 전 세계로 수출됐다. 그러나 유독 프랑스에서는 도라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 교육 교재로 쓰인다. 주인공 도라가 친구들을 만나면서 경험하는 것들을 설명하는 내용인데 프랑스에서는 영어 대신 프랑스어 단어를 가르친다. 도라를 따라다니는 원숭이는 부츠를 신었다고 ‘부츠’라고 불리는데 프랑스에서는 가죽 신발을 뜻하는 프랑스어 ‘바부슈’가 이름이다.

파리 젊은이들의 거리인 레알에 가면 ‘뜨거운 개(le chien chaud)’ 요리를 파는 패스트푸드 가게가 눈에 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핫도그를 파는 곳이다. 영어의 ‘hot dog’를 프랑스어로 그대로 바꿔 놓은 것이다. 장난기가 어려 있지만 프랑스 사람들의 자기네 말에 대한 애착이 느껴진다.

이따금 프랑스 신문에는 ‘전국 받아쓰기 왕’의 공부 비법이 소개된다. 프랑스어는 시제와 주어·목적어의 성에 따라 동사와 형용사 등이 다양하게 변화하기 때문에 어른들도 맞춤법을 틀리곤 한다. 그 때문에 전국 규모의 받아쓰기 대회가 열리기 몇 주 전부터 프랑스 사람들은 대형 서점을 찾는다. 예상 문제집을 사서 공부하기 위해서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기구는 모든 자료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낸다. 회의 통역도 영어와 프랑스어로 동시에 한다. 그 때문에 수십억원의 예산이 추가로 들어간다. 이쯤 되면 프랑스 사람들의 행태가 시대에 뒤떨어진 게 아닌가도 싶다. 이미 세계 공용어가 된 영어를 유일하게 부정하는 나라 같아서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의 이런 고집은 현실을 외면하자는 게 아니다. 프랑스어를 가장 프랑스어답게 말하는 것으로 이름난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은 “우리가 문을 닫고 프랑스어만 하자는 게 아니다. 공용어가 된 영어 속에서 프랑스어를 잃지 않겠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었다.

우리 사회를 보자. 좀 배웠다는 사람들은 말할 때 영어 단어 한두 개쯤 섞어야 문장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영어 좀 해야 식자층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어에 매달리는 우리가 애써 자기 말을 지키려는 프랑스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토플성적 순위를 보면 프랑스가 우리보다 40계단 이상 위에 있다.

유별난 프랑스어 사랑으로 이름난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하버드 유학생이다. 뉴욕에서 택시기사 아르바이트도 했다. 고급 영어부터 밑바닥 속어까지 두루 꿰고 있는 그다. 그런 시라크가 단 하나라도 영어를 섞어 가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내일은 한글날이다. 영어 몰입 사회에 있는 우리도 하루쯤 프랑스 사람들의 유별난 자기 말 사랑을 새겨봤으면 좋겠다.

전진배 파리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