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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왕에게 동지는 없다, 신하만 있을 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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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호 32면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민무질 묘. 태종의 처남 4형제 중 유일하게 묘가 전한다. 민무구·민무휼·민무회의 묘들은 실전이라고 한다. 민무질은 제주도에서 자진하여 문종 때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민무질 묘 앞에 있는 민무질 신도비. 사진 권태균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태종③ 외척과 공신 숙청

1402년(태종 2년) 3월 7일. 태종은 성균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 권씨를 ‘어진 행위가 있다는 이유로’ 후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혼인을 주관하는 가례색(嘉禮色)까지 설치했으나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가 태종의 옷을 잡으며 “제가 상감과 어려움과 화란(禍亂)을 함께 겪어 국가를 차지한 것인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라고 거칠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환관과 궁녀를 시켜 권씨를 쓸쓸히 별궁(別宮)으로 안내해야 했다.

『태종실록』은 “상이 며칠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즉위 직후에도 “중궁의 투기 때문에 경연청(經筵廳)에 나와 10여 일 동안 거처하였다”고 『정종실록』이 적고 있는 대로 민씨의 투기는 처음이 아니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의 취첩(取妾)은 왕실의 안녕을 위한 합법적 제도였다. 궁중의 모든 여성은 내명부(內命婦)에 소속된 여관(女官)으로 왕비의 지휘를 받았다. 후궁에게는 정1품 빈(嬪)부터 종4품 숙원(淑媛)까지 주어졌고, 정5품 상궁 아래는 궁녀였다. 왕비에게 궁중의 여인들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통솔의 대상이었다. 태종이 더욱 심각하게 여긴 것은 ‘내가 상감과 어려움과 화란을 함께 겪어 국가를 차지했다’는 말이었다. 여흥(驪興) 민씨(閔氏)와 공동 왕권이란 뜻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숙번의 안성 이씨와 조영무의 한양 조씨도 지분을 요구할 수 있었다.

태종의 즉위 과정을 되짚어 보면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민씨는 고려 충선왕 때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 15가문에 들 정도로 명가였다. 게다가 제1차 왕자의 난을 처음 기획한 인물은 민씨 부인과 동생 민무질이었다. 『태조실록』은 먼저 민무질과 상의한 부인 민씨가 종 소근(小斤)을 급히 궁으로 보내 방원을 불렀고, ‘셋이 비밀리에 한참 이야기’한 후 거사에 나섰다고 전한다. 환수령이 내려진 무기를 몰래 감추었다가 내놓은 인물도 부인 민씨였다.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 때도 “부인이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권했다”고 『정종실록』은 전한다. 제1, 2차 왕자의 난 모두 처남 민무구·무질이 선봉에 서서 칼을 휘둘렀고 두 처남은 공신에 책봉되었다. 부인 민씨가 태종의 왕위를 두 가문의 것으로 생각한 것은 일견 당연했다.

그러나 태종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즉위를 천명(天命)의 결과로 보았다. 처남들은 천명을 따른 것으로서 그 대가로 왕권의 분할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즉위한 이상 처남들은 동지가 아니라 신하였다. 국왕과 동지인 공신이 존재한다면 법치(法治)는 무너지고 인치(人治)가 횡행할 것이었다. 그러면 국가는 특정 세력의 사적 이익에 종사하는 기관으로 전락할 것이었다.

태종의 이런 우려를 무시한 채 민씨 형제들은 즉위 초부터 세력 확장에 나섰다. 태종이 원년(1401) 정월 초하루 강안전(康安殿) 터에 거둥하여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데, 상장군(上將軍) 이응(李膺)이 차서(次序)를 잃었다고 사헌부에서 탄핵했다. 태종은 “민무구가 사헌부를 사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응이 민무구 등에 대한 총애가 너무 극진하다며 “억압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제거하기 위해 탄핵했다는 뜻이었다. 태종이 권력 배분을 거부하자 형제는 스스로 세력을 키우는 한편 세자에게 접근했다. 태종에게 이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종 7년(1407)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화 등이 민씨 형제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공세의 시작이었다. 이화는 태조의 이복동생이자 태종의 숙부라는 점에서 사전 교감에 의한 상소였을 것이다.

지난 해(1406) 재변(災變)이 끊기지 않는다며 태종이 양위를 선언했을 때 모든 신하가 명의 환수를 극력 요청했으나 형제는 은근히 선위(禪位)를 바랐다는 혐의였다. ‘태종이 선위 계획을 발표했을 때 모든 신민은 애통해했으나 민무구 형제는 화색을 띠었다’는 심증뿐인 공격이었지만 어린 세자를 끼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였으므로 죄는 위중했다. 두 형제가 강하게 반발하자 이조참의 윤향(尹向)이 ‘태종이 양위하려고 할 때 민씨 형제가 비밀리에 내재추(內宰樞)를 선정했다’고 폭로했다. ‘내재추’는 고려 말기 5, 6명의 대신이 전권을 행사함으로써 왕권을 약화시켰던 기구였다. 이런 공격이 잇따르면서 두 형제는 태종 8년(1408) 10월 지방으로 쫓겨나야 했다. 태종은 이때 처남들을 내쫓는 교서를 발표해 ‘임금이 아들이 많으면 형세가 심히 불편하다’며 세자 외의 다른 왕자들을 제거해 ‘왕실을 약하게 만들려 했고’ ‘양인(良人) 수백 구(口)를 사천(私賤·노비)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태종 9년(1409) 우정승(右政丞) 이무(李茂)가 민씨 형제를 옹호했다는 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하면서 형제의 처지는 더욱 궁박해졌다.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에서 공격을 재개해 “자고로 난역(亂逆)하는 신하는 먼저 당(黨)을 만든 연후에 악한 짓을 감행하기 때문에 『춘추(春秋)』에서 그 당(黨)을 엄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면서 전 계림부윤(鷄林府尹) 이은(李殷) 등 13명을 ‘간인(奸人:민무구 등)에 아부한 죄’로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민씨 형제는 태종 10년(1410) 3월 제주 유배지에서 자진(自盡·스스로 목숨을 끊음)해야 했다.

5년 후인 태종 15년(1415)에는 남은 처남 민무휼·무회 형제까지 옥사(獄事)에 연루되었다. 노비 소송에 패한 전 황주(黃州)목사 염치용이 ‘태종의 후궁 혜선옹주(惠善翁主) 홍씨와 영의정 하륜 등이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패소했다면서 민무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무회는 충녕(忠寧·세종)에게 이를 알렸다. 충녕에게서 송사 이야기를 들은 태종은 “한낱 노비 소송에 임금을 연루시키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이 때문에 두 형제도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잇따른 비위 사건으로 처지가 불안했던 세자 양녕이 ‘작년(1414) 무휼·무회 형제가 두 형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했다’고 공격에 가세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게다가 태종 15년 겨울 ‘왕자 이비(이비)의 참고(慘苦)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태종은 6~7년 전 잠시 입궐했던 민씨 친정의 여종을 임신시켰는데 이 사실을 안 원경왕후가 겨울 12월에 산통(産痛)을 시작한 여종과 갓난아이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한 사건이었다. 자신의 혈육 이비와 그 모친을 죽이려 했던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민무회 형제 사건을 재조사시켰고 그 결과 세자에게 “무구·무질 형은 모반죄로 죽었으나 사실은 무죄입니다”고 옹호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두 형처럼 사약을 마셔야 했다.

외척뿐이 아니라 측근 이숙번도 제거 대상에 올랐다. 태종 16년(1416) 이숙번은 박은(朴誾)이 우의정이 된 데 불만을 품고 가뭄으로 모두가 근신하는데 입궐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숙번 역시 사형 위기에 몰렸으나 과거 태종에게 “신은 크게 우매하니 나중에 설령 죄를 지어도 성명을 보존케 하여 주소서(『태종실록』 17년 3월 4일)”라고 요청했었고 태종이 “종사(宗社)에 관계되지 않으면 어찌 보존해 주지 않겠는가”라고 답했었기 때문에 겨우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태종은 “전의 말은 종사와 관계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만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며 살아생전 도성(都城·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훗날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민무구의 옥사’에서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한 것은 무슨 죄에 연루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역적죄를 범했다면 여기에서 그칠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네 처남은 혐의는 뚜렷하지 않아서 많은 의혹을 낳았다. 사적(私的) 관점에서는 태종의 행위는 배은(背恩)일지 모르지만 이런 피의 숙청을 통해 왕권은 안정되어 갔다. 국왕과 동지적 관계라고 생각하는 신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 법 아래 복종했다. 현재도 우리 사회의 고질인, 최고위층과의 사적 친분에 의한 권력의 사적 점유를 태종은 확실히 단절시켰다. 이렇게 조선은 정상적인 왕조가 되어 갔고, 이런 왕조를 물려주기 위해 태종은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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