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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신사가 사랑한 오페라 속 발레리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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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호 10면

19세기 유럽 오페라의 메카는 프랑스 파리였다. 1848년 ‘드레스덴 혁명’에 가담했다가 스위스 취리히에 망명 중이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마침내 파리 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파리 오페라 극장장은 오페라 ‘탄호이저’의 상연을 앞두고 바그너를 만나 발레 얘기부터 꺼냈다. 제2막에 발레 장면을 반드시 넣어야 흥행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베르디의 ‘돈 카를로’ ‘맥베스’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도 예외 없이 파리 공연을 위해 발레 장면을 추가로 삽입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의 무대이야기

바그너는 파리에서 작곡가로 성공하기 위해 ‘19세기 유럽 문화의 퇴폐주의’와 손잡기로 했다. 1845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탄호이저’에 바쿠스 춤을 삽입한 것이다. 하지만 질펀한 춤이 벌어지는 비너스 동산 장면은 제2막이 아닌 제1막이었다.

1861년 3월 13일 ‘탄호이저’ 파리 공연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관객은 휘파람을 불면서 야유를 퍼부었고 주먹 다툼까지 벌였다. 겁도 없이 발레 장면을 제2막에서 제1막으로 옮긴 작곡자에게 ‘자키 클럽’이 따끔한 맛을 보여주었다. 이들 청년 귀족은 평소 같으면 느긋하게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제2막 시작 무렵 극장에 도착해 발레리나의 미끈한 다리를 감상했을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난동 끝에 ‘탄호이저’ 파리 공연은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

승마 동아리로 출발한 자키 클럽은 오페라 극장에 박스석을 여럿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말(馬)과 발레에 미친 사람이었다. 과장을 좀 보태 대포 크기만 한 쌍안경을 들고 공개 장소에서 ‘합법적’ 관음증(觀淫症)을 즐겼다. 당시 언론은 후손이 이 쌍안경을 보면 거인국에서 사용하던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고 썼다.

극장 측에선 자키 클럽은 물론 국회의원ㆍ귀족ㆍ고급 관료ㆍ언론인 등 평소에 잘 모셔야 할 사람들에게 백스테이지 출입 허가를 했다. 이들은 발레리나가 무대에 등장하기 직전 워밍업을 하는 대기실에 들락거리면서 평소 점찍어 놓았던 발레리나에게 추파를 던졌다. 중간 휴식 시간에 박스석으로 발레리나를 불러들이기도 했고 극장 바깥에서 따로 만나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가벼운 매춘’의 대가로 발레리나들은 후견인으로부터 짭짤한 용돈을 받았다. 당시 수석 무용수를 제외한 평단원은 월급이 형편없었다. 신입단원은 오페라의 발레 장면을 통해 얼굴을 알리기에 바빴다. 당시 발레 교사들은 제자들에게 “발레는 도발적인 포즈와 자태로 관객을 흥분시키는 예술”이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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