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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매력탐구>KBS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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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악을 써대는 오빠부대도 없다.하지만 그를 향한 박수소리는 그치지 않는다.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스타가탄생하고 또 사라지는 방송연예계에서 꾸준히 자신만의 영역을 개발하고 지켜온 얼굴들.푹 곤 곰탕의 진한 맛이 느껴지는 이들은언제 보아도 즐겁고 편안한 우리들의 스타다.그들에게서 우러나는매력을 음미해본다.
[편집자註] 매주 일요일 낮 12시10분이면 흥겨운 나팔소리와 함께 컬컬하면서도 정겨운 목소리가 어김없이 안방을 찾아온다. KBS-1TV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 송해(본명 宋福熙.
69)씨.
162㎝의 단신이지만 언제나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칠순청년」의 정정함을 과시하며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55년 창공악극단을 시작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지도 벌써 40여년.하지만TBC 라디오 『가로수를 누비며』와 TBC TV 『고전유머극장』『좋았군 좋았어』등에서 얻은 왕년의 인기는 여전히 남아있다.
현역 최고참으로 아직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수록 움직여야 한다지 않아요.전국을 유람한다는 기분으로 즐겁게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다보니 보람도 느끼고 기분도 젊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팔도유람이 좋다지만1년의 절반을 집밖에서 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송씨는 그런일을 벌써 10년째 해오고 있다.이미 15년간 『가로수를 누비며』를 생방송으로 진행한 기록을 가진 특유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이 없으면 설명하기 힘든 대목이다.
녹화장소가 결정되면 언제나 하루전에 도착한다.그 고장의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서다.시장에서 물가도 알아보고 대중목욕탕에 들러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는 일도 빼먹지 않는다.요즘 세상이야박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넉넉한 장터인심이라는 게 아직 남아있음을 그는 이런데서 느낀다.무대에 나온 사람들은 『글쎄올시다』로 시작하는 송씨의 말투에 어느새 마음이 편해진다.60년대 박시명씨와 최초의 남자 더블MC로 황금콤비를 이루며 갈고 닦은재담실력 덕이다.재롱(?)을 떠는 것도 출연자들을 위한 배려다.마을 잔칫집같은 녹화장에서 촌부들이 보내는 작은 정성에는 그런 그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다.
『안동이었던가,어떤 분이 선물이라며 머리만한 메기를 가져나왔어요.그런데 녹화가 끝난뒤 한 청년이 찾아와 병환중인 어머니를위해 줄 수 없느냐고 하더군요.그러마하고 준 뒤 잊고 있었는데다시 그 지방을 찾아갔더니 그 청년이 어머니를 모시고 나왔더라구요.덕분에 다시 거동하게돼 고맙다면서.』 그가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또다른 이유는 가슴에 묻은 아들 때문이다.86년 외아들이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하자 『가로수를 누비며』의 애청자이던 택시기사들이 교대로 밤샘해준 고마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요즘도 곳곳의 크고 작은 무대에서 송해를 찾는다.그럴 때마다마다않고 발품을 파느라 일주일이 화살 같다.일이 없으면 종로2가 낙원동에 있는 원로연예인들 모임인 「상록회」에 나가 양훈.
구봉서.배삼룡.장동휘.최무룡씨등 선.후배,동료의 안부를 챙긴다. 따지고 보니 자신을 「곰팡이」라고 불러줄 만한 사람도 이제별로 없다.하긴 「막둥이」구봉서씨가 일흔둘이니.
기분이 좋거나 아주 힘들 때면 절로 나오는 노래가 있다.최병호씨의 『아주까리 등불』.가사와 곡조가 왠지 마음에 와닿아 흥얼 거리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애창곡」이 됐다.
『피리를 불어주마/울지 마라 아가야/산 넘어 아주까리 등불을따라/저멀리 떠나가신 어머님이 그리워/너 울면 저녁별이 숨어버린다』. 황해도재령 태생으로 해주음악전문학교를 다니다 단신 남하한 송씨는 부쩍 고향생각이 난다.북한 중앙방송의 「직장순회 노래자랑」과 합쳐 「남북통일 노래자랑」 사회를 해보는게 마지막꿈이다.그동안 멀어졌던 남북한이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신 명나는노래잔치로 물꼬를 터야한다는게 그의 요즘 생각이다.
글=정형모.사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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