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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56. 통일 연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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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필자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남과 북’의 한 장면.

중앙정보부가 긴장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맘대로 해라. 나는 통일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배짱을 부리기로 했다. 드라마 '남과 북'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북에서 온 사람들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만 들어도 눈물을 글썽거린다고들 했다.

사단에서 잡은 포로는 48시간이 지나면 군단으로 넘겨진다. 그동안 정보를 캐내려고 위협도 하고 협박도 해봤다. 장일구라는 인민군 소좌는 중대한 정보를 가지고 왔지만 자기 처를 찾아 주기 전에는 말 못한다고 버틴다. 사단장과 정보 참모는 우리의 비극을 우리의 손으로 해결해보자고. 청주에 있는 고은아를 데리러 L19를 띄운다. 지금 남편인 이해로 대위의 고민과 장소좌의 몸부림 사이에서 정보 참모는 눈물겨운 성과를 거둔다. 장소좌가 얼마 안 가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며 총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중대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것은 즉각 작전에 활용됐다. 고은아가 온다. 3자 대면의 장은 처절함의 극치였다.

이해로 대위가 고백한다. "대구 육군병원에서 완치돼 원대 복귀하기까지 나를 헌신적으로 돌봐주던 고은아에게 청혼했더니 북에 두고 온 남편의 소생을 지금 기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저 38선이 언제 무너지느냐, 만약 그 사람이 오는 기적이 생긴다면 그땐 돌려주겠다. 장소좌, 당신은 지금 왔다. 약속대로 하겠다."

장소좌는 고은아에게 말한다. "거 은아 눈이 제대로 백혔구만. 이케 좋은 사람을 만난 줄도 모르고. 내래…." 흐느끼면서 그는 "어서 이 대위를 따라 가라"고 한다. 자식을 만나는 장면은 눈물바다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죽는다. 한국 비극의 상징을 처참한 것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로 만들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동아일보 호현찬 기자의 중개로 극동영화사 차태진 사장한테 영화화 권리를 주었다. 당시 조선일보에서 운영하던 아카데미극장의 방우영 사장하고 셋이서 한잔했다. 두 사람은 다음해 신정 때 극장에 걸어야 되니 두달밖에 여유가 없다며 빨리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했다. 나를 반도호텔 909호실에 집어넣었다. 미 8군사령관 밴프리트 장군이 자는 방이란다. 나는 이틀 동안 한잠도 안 자고 탈고해 보내주었다. 김기덕 감독은 한 자도 고칠 데가 없다며 그대로 촬영에 들어갔다. 두달 만에 완성됐다. 신정 프로로 내놓으니 연일 만원 사례였다. 장소좌 역은 신영균, 이대위 역은 최무룡, 정보참모 역은 남궁원, 고은아 역은 엄앵란이 맡았다. 대종상.청룡상을 휩쓸었는데, 나도 두 곳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정부에서 훈장을 주겠다고 연락해오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그러나 대종상.청룡상 수상은 반드시 내 이력에 기록한다.

우리 비극의 고전이라며 TBC.MBC에서 TV 드라마를 만들고, 영화로는 세 번이나 제작됐다. 뮤지컬화되기도 했다. KBS는 라디오 드라마로 다시 만들기도 했다. 소설은 내가 쓴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 주제가처럼 써주는 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이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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