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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소로 살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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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싸움 중에서 제일 미련한 듯 보이는 것이 소싸움이다. 소는 오직 머리와 뿔로만 싸운다. 자기 머리를 짓찧으며 싸우는 가장 미련한 것이 소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정직한 싸움이다. 며칠 전 서울 평창동의 가나 포럼 스페이스에서 마주한 사진전 ‘한명이’는 그 미련해 보이는 소싸움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한명이’는 싸움소의 이름이다. ‘한명이’는 뿔의 생김새 때문에 싸움소가 됐다. ‘한명이’는 종달새의 머리 깃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은 ‘노고지리뿔’을 가진 싸움소다. 다섯살배기 싸움소 ‘한명이’의 전적은 24전20승4패다. 아직 풋내기다. 하지만 싸움소 ‘한명이’는 세 번 받히고 네 번 떠밀려도 다시 치받는 타고난 싸움꾼이다.

#싸움소 ‘한명이’를 진주의 소 싸움터에서 카메라 앵글에 담아낸 윤현수씨는 진주가 고향인 모 저축은행 회장이다. 하지만 한가해서 취미로 사진을 찍는 한량이 아니다. 사진 찍는 그 자체가 ‘삶의 싸움’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와 싸움소 ‘한명이’는 어딘가 닮았다. 그가 담아낸 사진에는 자신과 싸움소 ‘한명이’가 오버랩돼 뒤엉켜 있다. 사실 싸움소 ‘한명이’의 사진을 보노라면 싸우다 지쳐 혀를 내밀고 침을 흘리며 퀭한 눈에 눈물마저 머금은 모습이 영락없이 나요, 너요, 우리 자신이다. 싸움소 ‘한명이’가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 “탁탁.” 쇠뿔과 쇠뿔이 맞서며 소리를 낸다. 하지만 서로의 머리를 짓이기며 맞선 뿔과 뿔 사이로 정작 불꽃을 튀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와 소의 겨누고 맞선 눈이다. 그 순하디순한 소의 눈에 핏기가 서리고 살기가 돌 때 소싸움은 절정에 이른다. 소싸움은 상대가 포기할 때까지 계속된다. 어느 한쪽이 꽁지를 빼고 등을 돌려 도망가야 승부가 난다. 그전엔 누구도 말릴 수 없다. 우리네 삶의 싸움도 그렇다. 끝까지 싸우는 거다.

#싸움에서 지는 소는 그 동작만으로도 알 수 있다. 싸움 도중에 고개를 돌려 달아날 방향을 찾거나 꼬리를 흔들거나 뒷배가 바람 들었다 빠지는 풍선처럼 들쭉날쭉하거나, 아예 똥을 싸거나, 혀를 빼물고 입에서 거품을 내뿜는 소는 틀림없이 진다. 하지만 지는 것은 몸이 먼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부서지고 흩어지는 것이다. 정신이 부서지고 혼이 흩어지면 몸은 따라서 무너질 뿐이다.

#소싸움의 기본자세는 머리를 낮추는 것이다. 머리를 들면 치받힌다. 그래서 강한 소일수록 머리를 더욱 낮춰 파고든다. 낮출수록 이기는 소싸움. 거기엔 모든 싸움의 비결이 담겼다. 세상 모르고 홀로 높은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것은 치받히게 마련이고, 결국 스스로 무너진다. 하지만 끊임없이 낮춘 자세는 무섭게 파고들며 세상을 뒤집는다. 그래서 누운 풀잎 같은 민심이 무서운 것이고, 숨죽이며 관망하는 바닥의 흐름이 두려운 것이다.

 #소는 두 종류다. 비육소와 싸움소. 비육소가 돼 살집만 키우다 기껏해야 2년이면 도살돼 정육점에 걸리는 소가 있고, 싸움소가 돼 자기 목숨을 걸고 10년 이상을 싸우면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다 죽는 소가 있다. 비육소가 될 것인가, 싸움소가 될 것인가. 그 선택과 결정이 지금 바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싸움소로 살련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