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해방직후 私設정보대 운영-梨花莊소장 해방정국 文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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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승만(李承晩)은 1946년6월께부터 사설(私設) 정보조사기관인 KDRK(Keep Dr.Ree Korea)를 비밀리에 만들어 운영했음이 처음 밝혀졌다.KDRK는 좌익세력과 우익진영 내에서 이승만과 경쟁관계에 있는 정파(政派)들의 동향을 비롯해일반 여론 등을 파악하기 위해 이승만계 핵심 청년들을 중심으로조직,가동됐다.
이같은 사실은 이화장(梨花莊)에 소장돼 있던 해방정국 관련 「이승만 문서」에서 드러난 것으로 유영익(柳永益.연세대)교수가이를 발굴,본사 현대사연구팀에 제공했다.
〈시사월간 『WIN』 9월호 참조〉 「KDRK 설치안」은 첫머리에 『우익 민족진영의 내부교란을 획책하는 좌익과 신익희(申翼熙).조소앙(趙素昻).엄항섭(嚴恒燮)등 한독당 계열의 반동적동향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세밀하고 확실한 정보 수집이 필요하다』고 강조 하고 있다.이 문건은 이어 『이승만 박사의 모든 정책 결정에 필요한 자료수집.여론조사 활동과 함께 경우에 따라서는 적(敵)진영의 교란과 민족진영내 반동분자들의 제압에 종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치목적과 임무를 밝히고 있다. 「KDRK 설치안」은 당시 이승만이 이끌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청년부 부장이었던 유산(柳山)이 중심이 돼 여훈(余勳).
최준점(崔峻點)등 3인이 공동작성했다.작성일자는 밝혀져있지 않다.그러나 구체적인 활동보고서를 제출한 시기등을 고려 할때 1946년6월께였을 가능성이 크다.
46년6월은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의 정치노선에 획을 긋는 중요한 시기였다.미군정(美軍政)이 추진하던 좌우합작운동에 맞서 이승만은 같은 달 3일 「정읍(井邑)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의사를 밝혔다.이어 29일에는 이를 실 현하기 위한기구로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했다.이러한 때에 이승만이 KDRK를 비밀리에 운영하려한 것은 미군정이라는 가장 유효한 정보원을잃은데 대한 대안적인 조치라 할 수 있다.
설치안에 따르면 KDRK는 중세 「프리 메이슨」식의 철저한 비밀결사체 운영을 원칙으로 했다.KDRK의 존재는 이승만의 비서나 최측근 인사에게도 일체 비밀에 부쳐졌다.보고체계는 이승만과 정보원이 곧바로 연결되는 수직 직보(直報)체계 였다.KDRK에서 일할 정보원의 자격요건은 매우 엄격해 「李박사에 대한 종교적 신앙을 가진 헌신적인 애국자」여야 하며,「소정의 인물 테스트에 합격한 지식계급 청년」으로 제한돼 있었다.
KDRK 정보원들은 46년7월16일부터 같은 해 9월26일까지 약 2개월여동안 1주일에 1~2회 간격으로 구체적인 활동보고서를 이승만에게 제출했다.
46년8월2일자 조선국방경비대(국군의 모체)에 대한 KDRK보고서는 『조선국방경비대 간부의 약 10분의8은 좌익으로 이들은 우리나라를 소련의 연방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며,『현국방경비대 내에 있는 좌익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해야 한다』고 이승만에게 건의하고 있다.
KDRK가 우익진영 내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신익희가 이끄는 정치공작대였다.KDRK는 46년8월13일자 보고서에서 『신익희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김구(金九) 선생이 신익희의 야심을 간파하고 정치공작대의해산을 권고했으나,申은 이 권고를 따르지 않고 야망 달성에 전력중』이라면서 신익희에 대한 경계의 끈을 늦추지말 것을 이승만에게 촉구했다.
또 KDRK는 이승만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李박사가 일층 더 국민운동을 강화하는 것이 인기 유지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동현 현대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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