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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티시 오픈? NO! 디 오픈 YES!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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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티시 오픈에 대한 스코티쉬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브리티시 오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The Open'!

"스코티쉬들은 왜 브리티시 오픈을 'The Open'이라 부릅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하나같이 눈동자에 불똥이 튄다. 그리고 단호한 눈빛을 내 눈높이에 맞추고 얼굴을 들이대며 (이쯤 되면 무척이나 Shy해진다) 명심하라는 듯, 집게 손가락까지 코 앞에 올려 까딱거리며 똑똑히 들으라는 듯 말한다. "그것은 최초의 챔피언십이자,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챔피언십이기 때문입니다. US 오픈도 마스터즈도 진정한 챔피언십이 아니다. 오직 The Open만이 진정한 챔피언십이지요."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챔피언십? 이는 원조 골프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자 미국으로 패권이 넘어간 골프에 대한 마지막 자존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방인의 귀에는 대단히 거부감이 느껴지는 표현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벽안의 외국인이 "왜 한국인들은 ‘기무치’를 '김치'라고 부릅니까?"라고 당초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어본다면 어떨까? 가뜩이나 일본이라면 예민해지는 우리네 국민성은 스코티쉬들보다 더 단호한 눈빛, 100만 볼트의 적개심을 담은 눈빛을 쏘며 (니 단디 듣그래이) "김치는 원래가 한국 것이고, 이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하는 김치 나라가 한국이다. 오리지날이 김치인데 기무치는 무슨 놈의 얼어죽을 기무치…" 라고 하지 않겠는가?

골프의 태생이 스코틀랜드인 것은 분명하지만 골프를 상업화시키고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나라는 분명 미국이다. 골프 선수도, 골프장도, 골프의 모든 헤게모니는 이미 미국으로 넘어갔다. 한국이 김치의 원조국이라지만 일본이 세계적으로 상업화 시켜버린다면, 그 성공으로 말미암아 한국 밖에서는 김치가 기무치일 수 밖에 없다면 누굴 나무랄 수 있을까?

각설하고, 다시 브리티시 오픈 얘기로 돌아가자. 브리티시 오픈 시즌이 되면 스코틀랜드는 마치 국경일을 맞은 듯 들뜬다. 언론은 의례 브리티시 오픈의 히스토리를 정리하며 역사적 의미를 곱씹는다. 이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프레스트윅 골프장.

1851년 Old Tom Morris가 디자인한 이 프레스트윅은, 1860년 최초의 디오픈 챔피언십을 개최한 골프장이다. 당시엔 12 홀짜리 골프장, 참가한 프로 골프 선수라고 해봐야 고작 8명에 불과했다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새로운 그린키퍼를 뽑기 위한 광고 형식의 이벤트였다지만 어쨌거나 그것이 디오픈 챔피언십의 효시였고, The Open은 이후 148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디오픈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 가장 의미 있는 골프장의 하나로 추앙 받을 프레스트윅 골프장 로비 프론트에는 첫 대회 이후 우승자들의 명단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Tom Morris 시니어와 주니어가 거의 도배를 한 역대 챔피언 명단은 1925년으로 끝나 있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1925년 이후 R&A는 프레스트윅을 ‘따’시켜버리고 몇몇 링크스가 로테이션으로 디오픈을 개최하는 현재의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어떤 이유에서 브리티시 오픈 개최지 중에 그 최초 개최지이자, 영국 골프장 서열 10위권에 드는 프레스트윅 골프장의 이름이 빠졌는 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1925년 이후 우승자 이름을 걸어주지 않은 것은 프레스트윅 골프장의 마지막 자존심일 것이다.

프레스트윅 코스는 비밀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전체 난이도 면에서는 턴베리나 로열트룬 보다 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블라인드 홀이 유난히 많았고, 곳곳에 숨겨진 벙커는 그 깊이와 면적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했다. ‘Cavernous sleepered bunker’라 불리우는 벙커는 나무 계단을 내려가야만 비로서 모래에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깊었다. 일단 벙커에 들어가면 리커버리 따위는 깨끗이 포기하고 탈출만을 목표로 가깝고 높게 봐야 한다.

과욕으로 불타던 동반자는 3번 홀 'Cardinal'이라는 별칭의 홀, 이름만으로도 그 깊이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바로 그 홀에서 무리하게 벙커 탈출을 시도하다 벙커를 두르고 있는 목재에 맞고 튀어나온 볼에 비명횡사하실 뻔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홀은 '히말라야'라는 이름의 5번 홀과 프레스트윅의 시그니쳐 홀인 17번 홀인데 둘 다 그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는 블라인드 홀이었다. 블라인드 파3 홀인 5번 홀은 높이 솟은 모래 언덕 너머 그린이 있고, 17번 홀은 페어웨이 언덕 아래에 사람 키의 5배는 됨직한 급강하 낭떠러지가 있고, 그 아래엔 그린 보다 큰 벙커가 입을 벌리고 있고, 그린은 그 벙커까지 넘어야 도달할 수 있다. 차라리 욕심을 버리고 낭떠러지 앞에 공을 세우고 그린 공략에 들어가는 것이 속 편하다. 그린을 직접 노렸던 골퍼들은 저마다 낭떠러지 아래 러프에서 공을 찾느라 마지막 홀을 남겨두고 정체 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디오픈 최초 개최지라는 역사성에 대한 자부심은 골프장 운영이나 시설면에서도 군데군데 드러났다. 티타임을 예약하면 복장이나 기본적인 에티켓에 관한 프린트 한 장을 건내주며 미리 숙지시킨다. 클럽하우스 내의 인테리어 또한 빛 바랜 사진과 골프 골동품들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매 홀 굵직굵직한 개성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코스는 골프장의 역사성 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위트가 숨어있는 인상적인 코스에서 The Open의 자존심을 만끽할 수 있었던 라운드였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