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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 CEO’의 밀어붙이기가 禍 불렀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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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25면

30년 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리먼브러더스의 젊은 채권중개인이 블랙잭을 즐기고 있었다. 수중의 몇 달러로 그는 거액 베팅가와 게임을 했다. 그는 계속 잃었고 상대방은 베팅액을 두 배로 늘렸다. 감동한 그는 냅킨에 적었다. ‘이게 정답이야. 충분한 자본을 모아라, 그리고 두 배로 불려라’. 그의 이름은 리처드 풀드(사진). 그는 훗날 리먼의 최고경영자(CEO)로 컸다.

리먼은 왜 무너졌나

풀드를 중심으로 한 리먼의 최근 행보를 보면 이 회사가 왜 파산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먼저 그는 최고의 프로를 자처하면서도 결국 ‘월가의 죄악’을 자행했다. 지난해 5월 풀드는 주택시장에 새 주사위를 던졌다. 다른 회사들과 함께 아치스톤 스미스 트러스트라는 아파트 투자회사를 15조원에 인수했다.

당시 주식으로 따진 리먼의 몸값은 20조원이었다. 문제는 이때 미 부동산 시장은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년간 ‘돈의 홍수’를 용인했던 미국이 돈줄을 죄기로 돌아선 지 1년째였고, 공룡 은행 중에선 처음으로 HSBC의 서브프라임 부실이 드러나 모두 몸을 사릴 때였다.

아치스톤 인수는 ‘고위험 고수익’을 먹고 자란 리먼의 DNA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리먼은 항상 몸집에 비해 부담스러운 회사에 달려들어 번개같이 낚아챘고 이런 레버리지 투자의 중심엔 풀드가 있었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고릴라’였다. 풀드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금리가 급락하자 적은 비용으로 돈을 조달해 과감한 레버리지 투자에 나섰다. 그 덕에 2005~2007년엔 사상 최고의 실적을 뽐냈다. 그 대가로 수천억원대의 보너스와 스톡옵션을 받기도 했다.

둘째 문제는 ‘조직 난맥’이었다. 덩치가 크면서 하나 둘 상처가 곪았다. 2004년 풀드는 어음중개인 출신의 조 그레고리를 사장에 앉혀 내부 직원들의 불만을 샀다. 그가 행정업무에만 집착하고 리스크 관리는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 사장이 지난해 여름 거래원 출신의 에린 캘런을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임명하자 내부 비판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풀드는 비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아이다호주의 맨션에 머물거나 여행을 다니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령탑의 정신무장 해이’가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이러는 동안 리먼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의심의 눈초리가 번졌다. 리먼은 월가의 네트워크를 가동해 6조원을 긴급 수혈했고, 한국 산업은행에 투자 의사를 타진했다. 리먼은 이달 초 분위기 쇄신을 위해 퇴직 임원을 부르는 인사를 단행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공격적인 행보로 컸던 리먼은 정글 같은 시장에서 복수를 당했다. 누구도 리먼에 돈을 대주지 않았다. 급기야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이 나서 12일 월스트리트의 거물들과 리먼 대책을 논의했다. 결론은 곧바로 내려졌다. 리먼을 인수하려면 정부의 보증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있었지만 폴슨은 미련을 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리먼의 역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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