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홍진기 본사前회장 10주기기념 특별강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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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는 이제부터 「독일통일과 언론」이라는 주제를 세가지 다른 시간의 지평에서 다루고자 합니다.첫째 시기는 분단 40년이고,둘째 시기는 거대한 전환-89년과 90년 사이의 공산주의의 몰락기며,마지막 시기는 통일이후 6년의 기간입니다.
언론이 많은 자성을 통해 냉전적인 사고와 증오.대립을 허문 것은 60년대 중반이었습니다.언론은 서로간의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데탕트,군축,협력,더욱 밀접한 접촉,그리고 당시「사람들끼리의 긴장완화」로 불렸던 것에 의지해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도움을 줬습니다.
***아데나워 정책에 반대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새로운 사고방식은 동독이 61년 8월 장벽을 세워 베를린을 두개로 쪼개고부터 시작됐습니다.비록 통일은 달성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국민간의 접촉은 장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민족의 실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통일로 가는 「큰 걸음」이 불가능할 때 「작은 걸음」이라도 떼어야 했습니다.
「작은 걸음」정책은 언론에 의해 적극 장려됐습니다.우리는 상호불인정.비교류 정책을 추구한 아데나워 정부의 공산주의 봉쇄정책에 반대했습니다.우리는 분단시대에 헤어져 있던 양독(兩獨) 주민이 서로 만나기 위해서라면 공산주의자들이 증오 스러워도 그들의 체제와 협상할 것을 고려했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자세는 일반 대중에게서 빠른 호응을 얻었습니다.이는 곧 에곤 바르의 「친선을 통한 변화의 바탕」이 됐습니다.69년 빌리 브란트가 총리에 오르자 바르는 새로운 「동방정책의 설계자가 됐고 그의 구상은 곧 현실화됐습니다.
70년대초 체결된 서독과 동독의 기본조약을 포함한 서독정부와동유럽블록 국가들간의 조약들은 독일인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삶의 방식(modus vivendi)」이 됐습니다.핵시대에서이것은 「죽음의 방식(modus moriend i)」이라는 대안보다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동방정책에 일부 회의적 헨리 키신저가 말했듯이 역사는 동질성보다 유사성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이러한 관점에서 다음 네가지 동방정책의 원칙과 그 수행과정은 아마도 동북아시아에서 미래에 펼쳐질 극적 사건에 대한 단순한 관심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제1의 원칙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이는 독일.소련간에 70년 체결된 조약 전문(前文)의 핵심(키워드)입니다.현상유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제2의 원칙은 상호 접촉을 막지 않는 것입니다.방위력을 확고히 하되 자유로운 사고의 전파력을 믿어야 합니다.결국 데탕트는독재보다 민주주의를 선호할 것입니다.
제3의 원칙은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제4의 원칙은 또 다른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데탕트는 국가대 국가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한정돼서는 안되며,관계정상화란 직접적이며 즉각적으로 양쪽 지역의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돼야 합니다.양쪽 주민들의 상호교신과 상대지역에 대한 여 행을 허가해야 하며 일정한 범위내에서 상호 이주도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접촉과 방문,그리고 재화.용역.사상의 교류를 촉진해야 합니다.
동방정책은 이런 네가지 원칙의 토대 위에서 펼쳐졌습니다.
***東獨의 자유가 더 걱정 돌이켜보면 당시의 일부 관측통들은 동방정책의 원칙에 대해 의문을 나타냈습니다.
동방정책이 생존을 연장할 가치도 없는 동독 공산정권의 체질을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까,동방정책 때문에 서독인들이 동독 공산주의자들과 필요 이상 가까워지지 않을까,그리고 양독 주민들 모두가 통일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 믿도록 자신을 달래지는 않을까.
그러나 동방정책을 대신할 현실적 대안은 없었습니다.대부분의 독일 언론인처럼 나도 운이 좋다면 금세기가 지나기 전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생각했었고,더 운이 따르면 2030년이나 2050년에는 독일 문제가 다시 세계적인 의제로 올려질지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나는 개인적으로 동독과의 통일보다는 동독내 자유의 문제에 관해 더 걱정했습니다.만약 분단의 지속상태가동독에 민주주의를 세우고 이 지역을 진정 독일답고 자유롭게 만드는 대가로 요구된다면 나는 기 꺼이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독일통일(1989~90) 통일을 이룬 것은 독일인들이 아닙니다.통일이 독일인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또한 이것은 서독의 공작에 따른 결과도 아닙니다.오히려 우연한 요소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결과였습니다.그러한 요소들로는 옛 소련에서의 자유개혁,동유럽권에서의 변혁,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체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동독인들의 확고한 자세를 꼽을 수 있습니다.당시 동독의 국경인 엘베강과 오더강 사이에서 독재체제에 저항해 들고 일어난 민주시민들의 항거는 짧은 시간에 동독의 국가체제에저항 하는 국민적 봉기로 변했습니다.
***英.佛등 우방들 통일 반대 민중봉기의 전 과정에서 엘리트 지식인의 역할은 필연적으로 제한됐습니다.신문.라디오.TV는통일을 부추기는 역량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저항운동의 진행과정을 반영하고 기록했습니다.언론매체들은 동독에서 무척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는데 에리히 호네커가 물러나고 나서야 통일사회당의 언론장악도 사라졌습니다. 헬무트 콜 총리는 완전한 통일의 시기가 무르익기까지는 5년내지 10년간의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그는 서방우방 가운데도 독일의 통일에 반대하는 나라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동독체제 의 수명을연장하기 위해 키예프와 동독으로 날아갔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무 소득도 거두지 못했습니다.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총리 역시 독일통일을 저지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습니다.이탈리아의 줄리오 안드레오티 총리는 분단된 독일이 통일 된 독일보다 좋다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오직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만이 새로운 국가통합을 목전에 둔 독일인들의 앞길을 축복해주었습니다.
***콜정부 편입案 적극 지지 당시 두개의 독일을 통합하는데는 두가지 방안이 있었습니다.첫번째는 헌법 제23조에 의거해 동독이 서독에 편입하는 방식이고,두번째는 헌법 제146조에 따라 통일 독일을 위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것입니다.독일언론은 첫번째안을 지지 하는 콜정부를 강력하게 지원했습니다.
시간이 지체되는 통일방식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포기 정책」에 대한 모스크바 내부의 반대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독일통일이 6개월만 늦었어도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정책을 관철하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통일과제(1990~96) 언론은 통일후 6년 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언론은 무엇보다 먼저 옛 동독의 상황에 관한 사실들을 정확하게 지적해냈습니다.
통일 당시 동독의 상황은 어느 누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빴습니다.언론은 동유럽경제의 실상과 45년간의 공산주의 압제로 인한동독주민들의 깊은 정신적 상처를 보도했습니다.또한 언론은 동독을 변화시켜 나가는 일련의 정책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해냈습니다.
오는 10월이면 독일 통일도 만6년이 됩니다.외형적 통일은 이룩했지만 내면적 통일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지금 이 순간에도 독일인들은 여전히 두개의 서로 다른 사회.경제 체제,그리고 의식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 다.
***국영기업 사유화 성공적 90년 이후 서독은 국민총생산(GNP)의 7%에 해당하는 약 1조마르크의 재정지원금을 동독지역에 쏟아부었습니다.이것은 전후 최대의 원조사업이었던 마셜플랜을 능가하는 역사상 최대규모의 원조였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서독의 생활방 식이 옛 동독인들에게 스며들지는 못했습니다.
옛 동독지역은 과거 5년 동안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통일전옛 동독지역에는 2만개의 사기업과 1백80만회선의 전화선,그리고 3백90만대의 자동차가 있었습니다.
현재 옛 동독지역에는 50여만개의 사기업과 5백만 이상의 전화회선,그리고 7백만대에 육박하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도로와 철도망이 현대화됐고 어디를 가나 새 빌딩이 들어서고 있으며 기존의 낡은 건물들도 새로 단장되고 있습니다.통일후 초래된 산업규모 축소는 2년전부터 정상을 회복했으며 최근 8~9%를 웃도는 성장률은 아시아지역의 경제성장률에 육 박하는 것입니다.1만3천여개의 국영기업 사유화도 전반적으로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모든 점에서 옛 동독지역은 발전의 전면에 떠올라있습니다.예를 들어 라이프치히는 독일에서도 최첨단 통신시스템을자랑하며,지멘스는 최근 드레스덴에 최첨단 반도체칩공장을 짓고 생산에 들어갔습니다.
***산업생산 회복 시간걸려 그러나 동전의 뒷면을 무시할 수없습니다.옛 서독지역으로부터의 막대한 지원자금(95년의 경우 2천억마르크)중 단지 3분지 1만 투자에 사용됐습니다.나머지 자금은 사회 안정을 위해 사용됐습니다.
실업의 충격을 완화시키는데(옛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공식적으로는 15%이나 실제로는 그 두배에 이른다),그리고 옛 서독지역의 85%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사회보장 연금 및 임금 수준을맞추는데 쓰였습니다.지난해 옛 동독지역의 산업생 산은 여전히 90년 통일 당시의 옛 동독 GNP에 못 미치고 있으며,옛 동독지역의 생산성은 옛 서독지역 생산성의 5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옛 동독지역의 인구는 통일 독일의 20% 수준이지만 총GNP면에서는 통일 독일의 10 %,그리고 총 수출면에서는 단지 15%만을 담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言論만이 할수있는 일 독일은 통일로 체중은 불렸지만 체력은 약해졌습니다.독일은 더이상 저채무국이 아닙니다.지난해 재정적자가 2조마르크에 달했으며 이전의 경상흑자는 만성적인 적자로 돌아섰습니다(95년 2백50억마르크).그리고 독일은 더 이상 세계 주요 자본수출국에 속하지 않습니다.오히려 독일은 거대한 진공청소기처럼 막대한 외자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95년 5백60억마르크).
혼란의 시기에 언론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독일 통일에 관한 결론중 하나는 국가 전체에서 표현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언론은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습니다.다시 한번언론은 국가의 장래에 관한 국민적 논쟁을 수행하 고 있습니다.
언론의 과제는 사실을 거론하고,그 사실의 의미를 해석하며,의견을 제시하는 일입니다.그리고 통일후 지난 5년간 언론은 과거와타협하고,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며,미래의 임무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당파 또는 조합과 같은 다른 어 떤 집단보다 오랜 세월 분단돼 살아오는 동안 생성된 이질감을 극복하는데 공헌해 왔습니다.이것은 어떤 집단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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