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커버 스토리] 한국경제, 4대그룹이 이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올 들어 상장 기업들이 발표한 국내 설비투자 규모는 7조8468억원이다. 지난해보다 89.7% 증가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77.8%나 차지하는 삼성전자의 투자액(6조1088억원)을 빼면 사정이 달라진다. 나머지 업체의 평균 투자액은 695억원에 불과해 지난해(751억원)보다 되레 줄게 된다. 28일 증권거래소가 올 1~4월 중 상장기업들의 투자공시(37건) 내용을 분석한 결과다.

설비투자뿐이 아니다. 우리나라 경제에서 삼성.LG.현대차.SK 등 이른바 4대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난해 이들 그룹의 수출액은 모두 933억달러다. 전체 수출액(1938억달러)의 절반에 이른다. 또 이들의 매출액은 300조원을 넘어 지난해 국내총생산액(GDP)의 40%를 웃돈다.

주식시장에서 4대그룹의 비중도 절대적이다. 4대그룹 계열 상장사들의 시가총액은 199조4000억원으로 전체의 49%에 달한다. 시가총액이 사상 처음으로 400조원을 돌파한 지난 8일 기준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가 거시경제 운용의 틀을 짜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조동철 거시경제팀장은 "몇몇 그룹의 경영실적이 경제의 방향타를 가늠할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KDI는 지난 20일 경제전망 수정치를 내놓으면서 내심 고심했다. 체감경기는 여전히 싸늘한데 경제성장 전망치를 상향조정하자니 대다수 국민이 수긍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수정치를 다듬느라 최근에 신설한 계량모형팀도 동원했다.

산업연구원의 김용열 기업연구팀장은 "그나마 4대그룹이 선전한 덕에 우리 경제가 버티고 있다"며 "대그룹이 국가 경제를 이끄는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라고 말했다.

◇4대그룹의 힘=삼성전자는 지난해 56조원(해외법인 매출 12조원 포함)의 매출을 기록했다. SK그룹의 전체 매출과 맞먹는다. 메모리반도체와 휴대전화 수출이 늘어나 올해는 정보기술(IT) 제품의 수출이 300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사장은 "올해 삼성의 IT 수출품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15%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만이 아니다. LG는 세계 곳곳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는 전자제품이 적지 않다. '휘센' 브랜드의 에어컨은 4년째 세계시장을 호령하고 있다.

특히 인도.러시아.중국 등 떠오르는 수출시장에서 국내 그룹 중 가장 빨리 자리를 잡았다. 지난해 인도에서 1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러시아에선 LG 제품이 '국민브랜드'로 뽑히는 등 '명품'으로 대접받는다.

현대차는 지난해 140억달러어치의 자동차를 해외에 팔았다. 특히 자동차는 거의 모든 산업과 연관돼 있어 산업 유발효과가 크다. 철강 등 소재산업에서부터 금융.에너지.서비스업과도 밀접해 고용유발 인원이 150만명에 달한다.

국내 에너지의 40%를 공급하는 SK는 4대그룹 가운데 네트워킹 마케팅 기반이 가장 탄탄하다. 에너지와 통신 등 내수산업이 주력이지만 이를 통해 확보한 회원 수가 5000만명에 이른다. 이들 회원을 기반으로 다양한 신규사업을 펼칠 수 있다.

◇우리 경제 갈 길은=외환위기 이후 국내 경제의 문호가 활짝 열리면서 기업의 경쟁 구도가 확 달라졌다. 외국 거대기업에 맞설 만한 국제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은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반면 처진 기업들은 도태됐다. 외환위기 이후 30대그룹 중 14개가 사라졌다.

특히 연구.개발 투자 여력이 있는 대기업들은 반도체.자동차 등을 앞세워 해외에서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 이에 힘입어 올 1분기의 수출액은 전년 동기에 비해 무려 38%나 증가했다. 이에 반해 내수가 얼어붙으면서 중소기업과 내수 비중이 큰 기업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평균 가동률은 올 들어 60%대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

서울대 경제학부 이근 교수는 "경쟁력있는 기업들이 경제를 이끄는 것은 글로벌 경제 시대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 대부분이 세계시장에서 통하는 지식생산(특허나 신제품) 능력이 떨어져 생존하기 힘든 세상이 됐다"고 덧붙였다.

대그룹과 수출이 경제성장을 이끄는 데 대해 걱정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중소기업연구원의 유재원 동향분석실장은 "중소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 산업공동화를 우려하고 있지만 안 나가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수희 기업연구센터 소장은 "수출이 잘될 때는 문제가 없지만 해외시장이 나빠지면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킬 뾰쪽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나경제연구소 강문성 산업분석팀장은 "대기업을 끌어내리는 정책이 아니라 중소기업을 키우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이 4~5개는 더 나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고윤희.손해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