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김영희 칼럼

한반도 최악의 시나리오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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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정일이 쓰러지니 나라 안팎에서 수많은 해석과 추측, 정책건의가 쏟아져 나왔다. 김정일 유고(有故) 때 권력의 공백은 누가 메울 것인가. 막바지에 이른 비핵화 프로세스는 큰 폭의 후퇴가 불가피한 것인가. 북한 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하는 남한의 상생공영 정책은 궤도 수정을 해야 하는가. 북한과 한반도 관련 국제관계에서 한국의 행동반경은 줄어드는가, 확대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전문가들의 다양한 대답과 언론 보도는 모두 나름대로 경청할 만한 것들이다.

그러나 가장 유익한 실마리는 평양에서 나왔다. 북한 외무성이 8월 26일 발표한 핵 시설 불능화 중단 성명이다. 외무성은 북한이 6자회담의 합의에 따라 6월 26일 핵 신고서를 제출했는데도 미국은 약속한 기일(8월 11일) 안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지우지 않았다고 미국을 비난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1)핵 시설 불능화 작업을 중단한다. 불능화 작업 중단은 8월 14일 효력을 발생한다.

(2)우리 해당 기관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영변 핵 시설들을 곧 원상대로 복구하는 조치를 고려하게 될 것이다.

김정일이 8·15 전후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니 ‘우리 해당 기관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라는 구절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우리 해당 기관들’이 군부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군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남북 경협과 핵 포기정책을 견제했다.

북한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 이전에 클린턴의 평양 방문을 포함한 북·미 관계 개선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군부의 견제로 좌고우면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기회를 흘려보냈다. 군부에는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금강산과 개성 관광, 개성공단은 눈엣가시다. 핵을 갖지 않은 사담 후세인의 파멸을 본 북한 군부는 핵 포기는 미국의 위협에 대한 최상의 대응력(Deniability)의 포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이 비핵화와 남북 관계를 여기까지 진전시킨 것은 국방위원장인 그가 당과 군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라도 체력이 달리면 권력 장악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김정일이 쓰러진 것이 8·15 전후라면 그로부터 열흘 남짓 사이에 군부는 병상의 김정일로 하여금 비핵화 프로세스를 중단하는 조치를 재가하도록 설득 또는 압박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앞으로가 문제다. 김정일의 건강이 호전은 되지만 예전같이 정력적으로 활동할 수 없어 병상통치를 해야 한다면 군부는 핵 프로그램뿐 아니라 금강산과 백두산 관광, 개성 공단 확장을 포함한 남북 관계, 북한의 경제개혁과 개방 문제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보수·강경 노선 복귀를 위해 새로 생긴 힘을 쓰지 않을까 걱정된다. 북핵과 한반도의 평화에 관한 최악의 시나리오 조합은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잘 관리해 온 군부와 당·정의 균형이 군부 쪽으로 확연하게 기울고, 미국에서는 대북 정책에 관한 한 취임 초기의 부시를 닮은 존 매케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북한 군부는 매케인의 당선을 갈망할 것이다.

김정일은 언론에 의해 몇 번이나 죽었다 살아났다. 그래서 우리는 김정일의 유고설이나 와병설에 둔감해졌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유익한 ‘김정일 유고 연습’이다. 김정일 이후에 대비하는 쪽으로 대북 정책을 점검하는 좋은 계기다. 그러나 대북 정책 점검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화해협력 정책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 비상계획을 세워 정기적으로 도상훈련을 하면서 보완해 나가는 정도에 머물러야 한다. 북한이 내일 무너질 것처럼 요란을 떨어봐야 이미 나쁜 남북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한·미 공조 강화는 상식이다. 정부는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중국의 비상계획을 알고 있는가. 지금 급한 것은 이명박 정부 들어 막혀버린 대화채널을 복원해 신뢰를 쌓는 것이다.

조건 없이 주는 인도적 식량지원이 작전계획 5029보다 더 실용적인 신뢰 쌓기의 수단일 수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럴 때 어김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대북 강경론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념의 함정에 빠진 강경론자들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김영희 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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