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 못잖은 쇼맨십, 건반 위의 ‘완소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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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03면

만화 영화 ‘톰과 제리’에서 톰이 피아노 연주회를 여는 에피소드가 있다. 지나치게 긴 연미복을 이끌고 나와 그가 연주하는 곡은 리스트가 작곡한 ‘헝가리안 랩소디 2번’이다. 마침 피아노 뚜껑 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제리가 어떻게 해서든 이 연주를 망치려고 나섰다. 톰은 건반 사이에 놓인 덫을 피하고, 손가락을 고무줄처럼 늘려 가면서 연주를 완성한다.

올림픽 개막식서 ‘황허 협주곡’연주한 랑랑

이 장면이 재미있는 것은 신기한 음악 덕분이다. 리스트의 작품은 피아니스트에게 최고의 기량을 요구한다. 수십 개의 건반을 건너뛰는 것은 물론 빠른 템포로 같은 음을 반복해 두드려야 한다. 열 손가락으로는 부족하다. 정신없는 톰과 제리의 캐릭터에 딱 맞는 음악이다.

중국의 작은 마을 선양(瀋陽)에서 이 장면을 보고 매혹된 남자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저 곡을 연주하고 싶다”며 지방 공무원인 아버지를 졸랐다. 그리고 약 20년 후 아이는 미국 카네기홀, 영국 앨버트홀 등 세계의 톱 공연장에서 이 곡을 톰보다 더 신나게 연주하게 된다.

아이는 요즘 가장 ‘핫’한 피아니스트인 랑랑(郞朗ㆍ26)이다. 지난달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했던 유일한 클래식 아티스트다. 세계 메이저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최초의 중국인 피아니스트, 전 세계에서 한 해에 약 180억원을 벌어들이는 빅 스타다. 올림픽을 타고 중국 문화가 뜰 것을 예감한 기업들은 랑랑의 후원자를 자처하면서 운동화ㆍ만년필 등 각종 상품을 내놓고 있다.

개막식에서는 중국 작곡가들이 집단으로 만든 음악인 ‘황허(黃河) 협주곡’을 연주했지만, 랑랑의 스타일은 ‘헝가리안 랩소디 2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자유자재로 리듬을 당겼다가 놓고, 건반을 부술 듯 두드리는가 하면 박자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마음대로 연주하는 것이 ‘랑랑 스타일’이다. 과장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의 말투와 비슷하다. 팔을 번쩍번쩍 드는 연주 자세도 음악과 상관없이 늘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그의 연주 장면은 유튜브에서 ‘미친 랑랑(Lang Lang gone mad)’이라는 제목으로 유통되기도 한다.

이처럼 화끈한 스타일 때문에 랑랑의 연주는 늘 논쟁적이다. 그가 한국에 올 때마다 티켓을 매진시키는 ‘오빠 부대’가 있는가 하면 아예 그의 음악을 인정하지 않는 쪽도 있다. 한 음악계 인사는 그의 모차르트 소나타를 듣고 “국수를 후루룩 말아먹을 때 나는 소리”라고 일갈했다.

정교함ㆍ아름다움 등의 가치는 사라지고 뭉뚱그려진 음악의 이미지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한국 독주회에서는 앙코르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을 거의 주먹으로 치는 것처럼 연주했다. 영화 ‘샤인’에서 주인공이 빠른 손가락을 과시하는 곡이었던 이 작품에서 그 짧은 음표들이 다 뭉개졌다.

랑랑의 테크닉은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중국의 동갑내기 피아니스트인 윤디 리(26)의 손가락이 정교하다. 윤디 리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18) 우승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올 6월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내한 무대에서 윤디 리는 흠잡을 데 없는 테크닉으로 피아노를 장악했다. 감정 표현도 적당했고, 해석 또한 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대중은 랑랑에게 주목한다. 지난해 랑랑의 ‘왕벌의 비행’은 흥분된 분위기를 과장해 청중에게 전했고, 열광을 이끌어냈다. 청중은 윤디 리를 ‘존경’하지만 랑랑은 ‘사랑’한다. 중국이 올림픽에서 윤디 리 대신 랑랑을 선택한 이유다. 유럽에서 공부ㆍ연주를 착실히 계속하고 있는 윤디 리와 달리 랑랑은 NBC의 ‘투나잇 쇼’, 어린이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 등에 중국의 전통 의상을 입고 출연했다.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중국 민속 음악을 연주했다.

신나게 피아노 치는 톰이 되고 싶었던 아이는 이제 중국의 팽창하는 문화 역량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랑랑은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소형 난로도 사지 못한 채 추위를 잊기 위해 피아노를 쳤다. 그는 한 가정의 모든 자원이 한 명의 아이에게 집중된 시대가 낳은 작품이기도 하다. 랑랑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겹쳐 놓으면 중국의 변화라는 커다란 그림이 그려진다. 9일(성남아트센터)과 10일(예술의전당)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에서 랑랑은 중국의 무서운 기세를 고스란히 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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