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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代 국회 '신주류'가 뜬다] 2. 여성 의원 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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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성 의원이 20명만 있었어도 가족법 개정하는 데 37년이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인권운동가인 고(故) 이태영 여사가 생전에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실제로 1952년 시작된 가족법 개정운동은 89년에야 국회를 통과, 결실을 보게 됐다. 남성 중심의 국회가 여성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때문이다.

이로부터 15년. 17대 국회는 역대 국회 중 가장 많은 39명의 여성 의원을 배출했다. 전체 의원의 13%다. 16대 국회 여성 의원 비율 (5.9%.16명)의 두배 이상 되는 수치다. 여성 의원 수가 30~40%에 달하는 선진국 수준엔 못 미치지만 세계 평균(15.2%)에 근접하고 있다.

여성 정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열린우리당 이미경(3선)의원은 "2004년은 여성 정치의 원년"이라며 "여성 의원들이 세력화되면 고질적인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당 조배숙(재선)의원도 "16대 때 성매매 방지법을 통과시키면서 남성 의원들의 비협조 때문에 애를 먹었다"며 "여성 관련 정책과 입법 추진에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정당을 초월해 협력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조만간 당을 초월하는 여성 의원들 모임 '39클럽'(가칭)도 꾸릴 작정이다.

◇여성 당선자 38%가 운동권 출신=여성 당선자 39명 중 학생.여성.노동.시민운동에 몸담았던 이른바 '운동권'출신이 15명이다. 우선 80~90년대 진보적 여성운동을 이끌어온 여성단체연합(여연).여성민우회.여성의 전화 등 재야단체 출신이 대거 진출했다.

열린우리당의 이미경 의원, 한명숙.이경숙 당선자가 여연 대표 출신이다. 이승희(민주당)당선자는 여연의 비상근 정책실장을 맡아 이들과 한솥밥을 먹은 인연이 있다. 유승희(열린우리당)당선자는 여연의 추천으로 95년 광명시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경력이 있다.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은 80년 초 여성의 전화를 설립해 초대 원장을 지냈고, 한나라당 이계경 당선자는 87년 '여성신문'을 창간, 대표를 맡았다.

당시 이들은 각기 다른 단체에 몸담으면서 연대를 통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남녀고용평등법.성폭력 특별법.가정폭력방지법.영유아 보육법 제.개정 등 여성계 숙원사업들을 입법화하는 개가를 올렸다. 노동.농민.빈민운동 분야에서 활약한 인사들의 진출도 두드러진다. 금속노조 사무처장 출신인 민주노동당 심상정 당선자는 85년 구로동맹파업을 비롯해 25년 동안 일선 노조운동을 주도해 왔다. 같은 당 이영순 당선자는 노동.지역.여성운동을 두루 거친 여걸.

YH사건의 주역인 최순영 당선자는 노동자복지협의회.여성노동자회에서 활동했다.

이 밖에 열린우리당 홍미영(여성빈민).김영주(노동), 민주노동당 현애자(농민)당선자도 각각의 분야에서 한길을 걸어온 운동가 출신이다. 반면 제도권 여성단체인 여협(여성단체협의회)이 과거 여성 정치인의 주된 배출 통로 역할을 하던 풍조가 완연히 사그라졌다. 17대엔 2명(윤원호 부산여협회장, 장복심 여약사협회장)을 국회에 진출시키는 데 그쳤다.

◇급부상한 전문가 그룹=민주당 손봉숙 당선자는 10년 넘게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다 국회에 진출한 케이스. 90년 한국여성정치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을 지냈다. 95년 광역의회 선거 때 비례대표 10% 여성할당제를 시작으로 이번에 여성 국회의원 50% 할당제의 개가를 올리는 데 깊숙이 관여했다.

孫당선자와 하와이대 동문인 김애실(한나라당)당선자는 경제 분야에서, 이은영(열린우리당)당선자는 법률 분야에서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한 연구와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 밖에 법조계 출신으로 김영선(한나라당).조배숙 의원과 나경원(한나라당) 당선자, 언론계 출신으론 열린우리당 박영선, 한나라당 박찬숙.전여옥 당선자 등이 나란히 진출했다.

'여성파워'에 대해선 기대와 우려가 엇갈린다.

서울대 박찬욱 교수는 "여성의 대표성이란 측면에서 여성 진출은 더 확대되는 게 바람직하다"면서 "그러나 여성들이 선거 막판에 갑자기 충원됨으로써 의정 경험 부족 문제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이정민.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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