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북한의 쌀 전략 바로알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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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 정부는 지난 주 유엔의 제의에 호응해 북한 동포에게 3백만달러 상당의 식량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이제 북한 식량문제는 받는 쪽보다 주는 쪽의 문제로 됐다.주자,말자부터 어떤 조건으로 주어야 하는가에 이르기까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고있다.쌀문제의 본질을 알면 혼란 해소에 도움이 될까 해서 북한의 「쌀 전략」을 해설한다.
미국은 「두개의 코리아」정책을 굳혀가고 있다.미.북한 관계를발전시켜 한.미관계와 균형을 잡아가려 하고 있다.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국내법(PL-480)을 고칠 준비를 하고 있으며 국제기구와 국제 사회에 북한 지원을 요청했다.식량 지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북한의 수용」을 공론화하자는 움직임이다.연락사무소.경제원조.문화교류 등이이어질 것이며 수교 교섭도 시작될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북한수용 정책을 순탄하게 전개하는데 걸림돌이 될 한국 정부의 반대를 무마하는 분위기 개선 작전을 지금 펴나가고 있다.북한 동포의 어려움을 강조해 한국 국민이 앞장서 민간 차원에서 북한을 돕는 일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 다.
한국 정부는 두가지 압력을 받고 있다.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지원과 국내 민간 조직의 자발적 지원이 그것이다.이를 외면하면비인도주의적이며 동포사랑도 없는 냉혹한 정부로 몰리게 돼 있다.지난 11일의 유엔을 통한 정부의 식량 지원 결정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도 미국의 「두개의 코리아」정책을 돕고 있다.미국보다 앞서서 북한에 접근하면 한국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미국의 뒤에서 쫓아가고 있을 뿐이다.
중국도 미국의 「북한 살리기운동」을 묵인하고 있다.중국은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데 가장 소중한 완충지인 북한 정권 붕괴를 버려둘 리 없다.중국의 한 관리는 『북한 정권의 건재는 중국에필요하며,북한의 잔존을 위해 중국은 최소한의 지 원을 한다는 방침을 이미 세워놓고 있다.원유.양곡.석탄을 2백만씩 매년 지원하면 북한은 이 위기를 벗어난다』고 말했다.북한이 미국과 한국에서 50만의 양곡을 얻으면 1백50만만 주면 되고 못얻으면2백만 모두 주면 된다는 자세를 유 지하고 있다.
북한은 냉전 종식 이후의 각국 정책 변화를 정확히 읽고 이에편승해 대(對)한국 지위를 역전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냉전이 끝났는데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적으로 삼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북한은 잘 알고 있다.「한.미 동맹」은 옛소련을 의식한 동맹이었으므로 적이 사라진 지금 아무 의미도 없는 동맹이 되었음을 잘 안다.이러한 새로운 환경에서 북한이 미국에 호의를보이면 미국이 좋은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지금 그렇게 해 나가고 있다.
북한은 한반도내의 유일 합법 정부가 「인민공화국」이라 주장하고 있다.그동안 미국은 한국만을 국가로 인정하고 북한을 만나주지 않았다.그래서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전제조건을충족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마음에 없는 「당국자 회담」에 응하는척 해왔을 뿐이다.이제 미국이 북한과 직접 만나기로 했는데 한국과 만날 이유가 없다.북한은 「통일전선전략의 필요」가 생길때까지는 남북 정부간 회담은 거부할 것이다.
쌀문제도 그렇다.한국 정부는 그동안 북한이 요청하면 주겠다고선언했다.그러나 북한은 한국 정부에 요청할 리 없다.미국과 국제사회,한국내의 선량한 동포들의 압력으로 결국 한국 정부가 쌀을 내놓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왜 고개를 숙이고 달라고 하겠는가.북한은 한국 정부가 체면을 잃고 쌀을 가져다 바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이것이 북한의 「쌀 전략」이다.
이상이 최근의 이른바 「쌀 지원 싸움」의 진행 상황이다.선거에 들뜨고,축구로 흥분하고,국회 개원을 둘러싸고 여야가 소꿉장난을 매일 벌이고 있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미국을 상대로 벌이는 외교전에서 우리는 북한에 지고 있다.여기에서 지면 한국 정부는 남북한 대결에서도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된다.북한이 곧 허물어져 통일이 이뤄지리라는 백일몽에서 빨리 깨어나 할 일부터 해나가자.대북한 정책과 외교 정책을 통합해 기획하고 통제.관리.추진할 최고 지휘부를 빨리 만들라.
이상복 서강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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