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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엄마 품’같은 정부 못 떠나는 중소기업 강제로 끌어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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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경기도 안산에서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A사는 한 해 매출액이 2000억원에 달하고 종업원이 980명인 탄탄한 중견기업이다. 자동차 범퍼 분야에서 업계 최고의 품질력을 자랑하고 미국에 지사까지 냈지만 남모를 아쉬움이 있다. 회사가 잘돼 덩치가 쑥쑥 커지는 건 좋지만 ‘중소기업 졸업장’이 달갑지 않은 것이다.

이 회사의 김모 사장은 “자본금을 60억원으로 고정시켜 중소기업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법이 규정한 중소기업 지위를 벗어나면 연구개발(R&D) 지원이나 법인세 같은 세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그는 “안산공단 안에서도 중소기업에 남기 위해 친인척 명의로 법인을 새로 설립해 사실상 분사하는 곳도 있다”고 전했다. 중소기업 간판은 달콤하다. 경영혁신·협동화사업 등 저리의 정책융자금과 창업·설비투자·기술개발 등과 관련된 조세감면 혜택이 수두룩하다.

이처럼 무늬만 중소기업인 곳들을 솎아내기 위해 정부가 28일 칼을 빼들었다. 중소기업 범위를 합리적으로 조정해 대기업의 계열사나 자생력 있는 기업들을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청은 28일 이런 내용을 담은 ‘중소기업제도 개혁방안’을 내놨다.

중기청은 “개선책이 시행되면 2000여 중견기업이 중소기업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여기서 확보한 세수는 창업 초기 중소기업이나 신소재·신기술 등 첨단 중소기업에 집중 지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일단 중견기업 기준을 상시근로자 1000명 이상과 자산총액 5000억원 이상, 자기자본 1000억원 이상으로 할 방침이다. 또 중소기업을 졸업해 중견기업으로 분류되는 기업들엔 별도의 맞춤형 지원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대기업-중소기업’ 이분법을 기준으로 펼친 지원정책을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 3분법으로 전환한다는 이야기다. 정부는 그간 대기업은 규제하고 중소기업은 지원하는 정책을 펴왔다.

중기청의 정영태 정책국장은 “그동안 중소기업에 남기 위해 기업 규모를 인위적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비정규직 채용이나 불필요한 분사가 빈번했다. 중소기업 졸업제를 시행하면 불합리한 경영관행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개혁안에는 각 부처가 새로운 규제를 도입할 때 중소기업 사정을 감안해 주는 제도, 또 창업 초기에 각종 등록세를 면제해주는 제도, 중소기업 지원을 단일창구에서 해 주는 제도 등을 담았다.

중소기업 지원개혁에 대해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황인학 박사는 “국내 기업 분포는 매출액 5000억원 이하의 사업체가 99.9%를 차지하고 대기업이 극히 적은 기형적 구조다. 이번 조치로 경제 양극화를 덜고 질 좋은 일자리 창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소기업중앙회는 “자생력 기준을 단순한 매출액이나 상시근로자 수로 정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조만간 입장을 정리해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중소업체는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서비스업이 대형화되는 추세이니 중소기업 범위를 오히려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무늬만 중소기업’을 걸러내는 일은 역대 정권마다 숙원사업이었다. 하지만 모래알 같은 중소업체의 표를 의식하다 보니 과감한 개혁이 어려웠다. 실제로 중소기업 관련법은 업종별 로비에 치여 이것저것 예외조항을 만들다 보니 ‘누더기법’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 개혁안이 어느 정도 강력히 추진될지 주목된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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