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베토벤’ 꿈이 영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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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8일 오후 2시30분 서울 건국대 사범대 311호 강의실. 홍은진(12·가명)양이 친구 3명의 손을 이끌어 교실 끝에 놓인 의자에 앉혔다. 이어 또 다른 친구 6명을 데려다 의자 앞에 세웠다. 홍양은 친구들을 인형 다루듯 만지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세를 잡게 했다. 친구들은 허리를 반쯤 구부리고 손을 위아래로 휘젓는 모습이 됐다. 장은영(31·여) 교사가 무슨 모양을 표현한 것이냐고 물었다. 홍양은 “올림픽 수영 경기에 참가한 선수와 심사위원을 표현했다. 1등은 박태환”이라고 말했다. 교실에는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이날 수업은 ‘건국음악영재아카데미’가 진행하는 방학집중프로그램 중 ‘발상의 표현’ 시간. 수업에 참가한 아이들의 꿈은 모두 음악가다. 예술가 지망생인 이들에게 음악성뿐 아니라 표현력을 길러주기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이 아카데미는 서울시의 위탁을 받은 건국대가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2인 이상 기준 367만원) 미만인 가정의 자녀 중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는 과정이다. 60명의 아이들이 혜택을 받았다. 가정 형편 때문에 제대로 된 레슨 한번 받아보지 못하던 아이들이 이곳에서 꿈의 날개를 달고 있다.

성악반에 입학한 정기쁨(16)양은 어머니, 여동생(13)과 11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산다. 아버지는 5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떴다. 노래에 재능이 있는 정양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대기업으로부터 300만원의 장학금을 받아 20일간 음대 교수의 부인에게 레슨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후론 매주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게 전부였다.

정양은 “예전에는 내 노래가 맘에 안 들어도 어떻게 할지를 몰랐는데, 이곳에서 수업을 통해 어떻게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피아노반 이홍우(15·가명)군도 비슷한 처지다. 건설일용직 아버지와 건물 청소를 하는 어머니의 월수입은 200만원이 채 안 된다. 사촌이 버리는 피아노를 가져온 5년 전까진 월 5만원짜리 동네 학원에서 매일 한 시간씩 피아노를 치는 게 연습의 전부였다. 이군을 가르치는 민경식(35) 교수는 “홍우는 곡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굉장히 짧다. 스펀지처럼 가르치는 걸 빨아들인다”고 말했다.

올 6월 처음으로 시작된 이 아카데미에는 정원의 두 배가 넘는 15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피아노·성악·작곡·관현악 4개 분야에서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선발했다. 현재 실력은 부족하더라도 잠재력 있는 아이들을 뽑기 위해 아카데미는 음악 적성 및 인지 검사를 했다. 여러 개의 화음을 들려주고 같은 화음을 골라내는 등 타고난 음악 감각을 측정하는 ‘음악 IQ’ 검사다.

최은식 아카데미 원장은 “성악반이나 작곡반에는 레슨 한번 받아보지 않은 학생뿐이지만 즉흥 연주를 시켜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표현력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수강생들은 12일엔 세종문화회관을 찾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리허설 장면을 지켜봤다. 아이들은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정명훈 지휘자가 이끄는 시향의 선율을 감상했다. 정 지휘자를 만나 기념사진을 찍은 아이들은 “꼭 저런 무대에 꼭 서보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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