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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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길례여사도 이렇게 마당에 나와 아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여사도 이렇게 하얀 도포 비슷한 실크 누비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라 하더라도 느낌이 같았다.이른 봄 고사리처럼 연약하되 강인한 분위기.품위 있으되 단정적인 말투.
그것은 소위 접신(接神)한 여인이 두루 지니는 내풍김이라 하더라도 생김새가 같았다.그리 큰 키는 아니라도 다리가 길어 늘씬하게 보이고 암사슴처럼 탄력있는 몸매.
무엇보다 눈이 같았다.굵고 검은 눈 형형한 눈빛으로 꿰뚫어보듯 유혹하듯한 눈매다.
-혹시? 두 사람은 모녀(母女)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떨렸다. 경복궁 앞 다방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미스터 조가흘린 말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아 있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어서 그런지 쓸쓸한 데가 있는 친구였지요.어머니는 가출하셨다고 들었어요.』 정길례여사의 그림이 표지로 실린 독서안내 책자를 보며 한 말이었다.
『그래선지 옛날 그림엔 언제나 고독감 같은 것이 서려 있었는데….이 그림은 아주 밝아서 좋군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자귀나무 아래서 소꿉놀이하는 그 그림이 눈에 선히 떠오르며정여사가 푸념처럼 한 것을 기억해냈다.
『중소기업의 「전무」라는 것이 허울뿐이지요.아이들 학비 뒷바라지하기 어려워 아버지께 물려받은 대장간을 헐어서 가게를 지어세놓고 있어요.서대문 시장터 초입이니 가게목은 좋은 셈이에요.
』 아버지가 「대장장이」였다는 것이다.
나선생 말도 생각났다.「신(神)님」이라 불리던 용한 무당이 제주도에 있었는데 교포 사업가가 일본에 모셔갔다는 얘기며,그녀는 원래 서울의 서대문에서 손꼽히던 대장장이의 아내였다는 얘기며…. 샤머니즘을 연구하는 스티븐슨교수에게 하던 이 노(老)무당의 자기 소개도 떠올랐다.
…열아홉에 시집가 아들을 낳았으나 곧 죽었다.그 후로 시름시름 앓으며 이상한 꿈을 많이 꾸었다.꿈에 용왕님이 나타나 함께잤다.황홀했다.그 후로는 남편과 밤일 치르기가 고통스러웠다.그런 대로 또 아이를 가져 딸을 낳았지만 어쩐지 정이 들지 않았다.어느날 쇠부리꾼들이 동네 장터에서 굿판을 벌였다.집집의 헌쇠붙이를 걸립패(乞粒牌)들에게 얻어 모아 주는 굿판이었다.꿈에서 본 용왕님이 그 자리에 나타나더니 가자고 하여 따라나섰다…. 분명히 이 여인이다.이 여인이 정여사의 「가출한 어머니」일것이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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