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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는 백수는 나라의 잠재력 아닌가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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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14면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센터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 ‘백수앤더시티’ 녹음을 위해 모인 김정환·김진규·김영준씨(왼쪽부터). 이들 세 백수의 엉뚱하고 유쾌한 입담이 네티즌을 사로잡고 있다.  신동연 기자

정환 : 요즘 추성훈씨 인기가 대단하죠? 그나저나 영준씨는 어제 뭐하고 지냈어요?
영준 : (잠시 고민하다가) 어제…집에서 혼자 밥 차려 먹었어요, 그런데 반찬이 없더라고. 집에서 굴러다니던 매운 맛 과자를 반찬 삼아 밥에 올려 먹었죠.
정환 : (어이없어하며) 추성훈씨도 그렇지만 노력 없는 대가란 없는 것 같아요.
진규 : 마린 보이 박태환 선수도 엄청난 노력파 아닙니까? 소문에 박 선수가 연습하는 수영장의 물이 그게 물이 아니라 땀이라죠!
정환 : (말도 안 된다는 듯) 헉! 그럼 처음부터 물 없는 수영장에서 연습했다는?
진규 : 열심히 하다 보면 땀이 나고 그게 수영장 물이 되는 거죠! 우리도 좌절하지 말고 그만큼 땀을 흘려봐야 돼!

‘백수 방송’ 3인의 엉뚱·발랄·유쾌한 응원가

최근 네티즌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 ‘백수앤더시티’의 7월 21일 방송(2회분) 내용 중 한 대목이다. 이 방송 진행을 맡고 있는 김영준씨 등은 20대 백수들이다. ‘백수가 백수들을 위한 방송을 한다’는 기발한 포맷과 거침없는 입담에 네티즌의 반응이 뜨겁다. 한 달 만에 방송 한 편이 나갈 때마다 클릭 수가 1만 건을 넘는다.

방송 타이틀인 ‘백수앤더시티’는 미국의 인기 드라마 ‘섹스앤더시티’를 패러디한 것이다. 톡톡 튀는 개성을 지닌 4명의 여성 뉴요커를 내세워 이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섹스앤더시티’처럼 ‘백수앤더시티’에도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세 명의 20대 백수가 등장해 자신들의 일상과 경험담을 코믹하게 풀어낸다.

이들을 만난 지난 14일은 한 인터넷 방송국의 스튜디오에서 ‘백수앤더시티’ 6회분 녹음(8월 25일 방송)이 있는 날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이야기로 시작한 오프닝 녹음 중 발음이 씹혀 세 차례 NG가 났다. 오프닝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세 사람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날 이야기의 주제는 ‘백수의 인맥 만드는 법’이다. 어떻게 하면 백수가 인맥을 만들 수 있는지, 자랑하고 싶은 인맥에는 누가 있는지 등 각자 준비해 온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자신의 경험과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내지만 이들의 방송엔 그냥 우스갯소리만 있는 건 아니다.

자판기 커피와 무가지 신문을 갖고 미국드라마 ‘섹스앤더시티’를 패러디한 모습.

“오늘은 주로 우리가 누구랑 아는 사이가 되고 싶다는 얘기를 나눠 봤는데요. 이런 생각도 드네요. 우리랑 아는 사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까요?”(정환)
“우리가 좀 더 노력해야죠. 어쩌면 방송 들으시는 백수 여러분은 저희를 좀 더 알고 싶어할지도 몰라요. ‘도대체 어떤 놈들이지?’ 하면서요.”(영준)
“우리도 누군가에게 자랑스러운 인맥이 되자고요. 할 수 있잖아요! ”(진규)

도대체 어떤 ‘놈’들일까. 동아방송대 방송극작과를 졸업한 이들은 영준(99학번)씨가 맏형, 정환(00학번)씨가 둘째, 진규(01학번)씨가 막내다. 졸업 후 각자 개그맨의 꿈을 키우다 셋이 의기투합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엉뚱한 놈(영준), 똑똑한 놈(정환), 모자란 놈(진규)이라는 각자의 캐릭터는 ‘백수앤더시티’의 재미를 더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들은 개그맨이 되기 위해 2006년부터 수차례 방송국 공채 시험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방송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케이블 방송의 리포터·VJ, 영화 엑스트라, 재연 드라마 단역 등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운 좋으면 3~4개월 고정 역할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어쩌다 한 번 들어와요. 대부분은 하루나 이틀 혹은 시간제 알바예요. 나이 들어서 언제까지 부모님에게 손 벌릴 수는 없고 돈 되는 일이면 뭐라도 해야죠.”(영준)

방송 쪽 일이 없다고 마냥 놀 수만도 없다. 휴대전화 판매, 학교 급식 배달·설거지, 헬스클럽 청소, 지방행사 진행 등 별별 일을 다 해 봤다. 이들의 한달 평균 수입은 60여 만원. 서울 신림동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정환과 달리 영준과 진규는 경기도 일산에서 보증금 1500만원에 월세 30만원, 관리비 10만원 하는 원룸을 얻어 함께 산다. 두 사람이 20만원씩 방세와 관리비를 부담하고, 친구들에게 빌린 돈을 그때그때 갚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다.

“팍팍한 백수 생활이지만 틈틈이 개그 시나리오를 짜 연습을 하면서 서로를 격려해요. 저희와 같은 백수에게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뜻을 담아 방송을 만들고 있죠.”(영준)

변변한 직업 없이 개그맨의 꿈을 좇는 백수 아들을 많이 이해해 주는 부모님이 있어 그래도 다행이다.
“어머니는 가끔 ‘그냥 남들처럼 직장에 취직도 하고 평범하게 살면 안 되겠느냐’고 하실 때도 있어요.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면서 슬슬 걱정도 되지만 개그맨의 꿈을 쉽게 버리지는 못할 것 같아요.”(정환)

대학 동기나 선후배 중 이미 꿈을 이룬 이들을 보면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KBS 19기 공채 개그맨으로 ‘개그콘서트’에서 활약하고 있는 장동민과 역시 KBS 19기 공채 개그맨으로 현재 MBC ‘무릎팍 도사’에서 건방진 도사로 유명해진 유세윤은 같은 학교 출신이다.
“처음엔 질투도 나고 부럽기만 했죠. 하지만 요즘에는 그 친구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느껴요. 지독한 연습벌레였으니까 성공하는 건 당연하죠.”

개그맨 유세윤씨와 친분이 두텁다는 영준씨의 말이다. 백수 생활이 벌써 2~3년이나 됐지만 ‘백수앤더시티’를 진행하면서 나름대로 ‘백수철학’이라는 게 생겼단다.
“백수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거지나 노숙자도 아니잖아요. 단지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죠. 백수라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추리닝에 슬리퍼 끌고 다니는 이미지를 연상하지만 꼭 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오히려 더 멋지게 자신을 관리하고, 지루한 일상에서도 작은 즐거움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죠.”(영준)

“농담 같지만 백수가 없다면 PC방·만화방이 장사가 잘 될까요? 백수도 사회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죠. 백수의 존재 때문에 직업이 있는 사람이 더 빛난다는 생각도 해요. 기죽지 말고 꿈을 키워 가는 게 중요하죠”(진규)
“어깨에 뽕이라도 넣고 다녀야죠. ‘노력하는 백수’는 잠재력 있는 우리나라 인재아닌가요?”(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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