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잊지 말자” 61년째 축구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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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패스해. 그렇지!” “슛! 슛!”

14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 1리 신광중학교 운동장.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선수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공을 쫓아간다. 천막 아래 모인 할머니·아주머니·아저씨로 구성된 주민들의 응원은 그칠 줄을 모른다. 포항의 변두리 신광면은 요즘 면 전체가 축구에 푹 빠져 있다. 올림픽 관전도 뒷전이다. 해마다 광복절을 기념해 열리는 ‘신광면민 친선축구대회’가 이틀째 열리고 있어서다.

신광면민 축구대회는 동네 축구지만 국내 어떤 축구대회보다 긴 역사를 자랑한다. 광복 2년 뒤인 1947년 8월 15일 처음 열린 대회는 올해로 57회를 맞았다. 면민들은 일제 강점기를 되새기며 ‘다시는 나라를 잃지 말자’라는 다짐을 하기 위해 축구대회를 시작했다.


당시 신광면에서는 이석백·이오특 등 영일군(포항시의 전신)을 대표하는 축구 선수들이 여러 명 나왔다고 한다. 이들은 조국이 광복을 맞자 두 번 다시 나라를 잃지 않기 위해 단결이 시급하다며 47년 광복절 기념 면민 축구대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초창기 선수로 출전했던 김길수(76·신광면 상읍 1리)옹은 “그때만 해도 짚신을 신고 짚풀공을 찼지만 참 열심히 뛰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대회는 4년 뒤인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52년까지 중단됐다. 전쟁이 끝난 뒤 면민들은 축구대회를 신광면의 전통으로 만들자며 대회를 재개했다. 면민들은 근근이 푼돈을 모아 대회 경비를 마련했다. 명맥을 이어가던 대회는 이후 가뭄이 극심했던 59년과 82년에도 일시 중단됐다.

60여 년이 지난 뒤 선수들은 이제 산뜻한 유니폼을 입고 연습도 풋살경기장에서 한다. 올해는 큰 선물도 받았다. 맨땅의 흙먼지 날리던 경기장이 인조잔디구장으로 탈바꿈한 것. 지난해 대회에 참석해 신광면민들의 축구 열정을 지켜본 박승호 포항시장이 “뜻 깊은 대회가 맨땅에서 치러지는 것을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다”며 5억원을 들여 인조잔디구장으로 개조했다.

면민들의 대회 참여는 극성스러울 정도다. 현재 신광면에 살고 있는 주민은 물론 돈벌이를 찾아 떠난 출향인도 휴가를 내 고향을 찾는다. 심지어 군에 입대한 선수 출신들도 휴가를 내 참가할 정도다. 경기도 포천에서 군 생활 중 휴가를 얻은 박준형(21)씨는 “우리에게는 이 대회 우승이 월드컵 우승만큼 대단하다”고 말했다.

면민들은 올해도 십시일반 대회 경비를 마련했다. 돈이 많은 사람부터 형편이 어려운 이웃까지 3000만원을 마련해 돼지 10여 마리와 김치냉장고 등을 부상으로 내걸었다.

축구대회는 신광면민(3500여 명)보다 많은 4000여 명이 사흘간 모여 22개 마을 27개 팀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연령 제한이 없어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선수로 출전한 마을도 있다. 3회 연속 우승하면 우승기를 영원히 가져간다. 그동안 사정 2리와 만석 2리 등 단 2개 마을만이 우승기를 가져갔다. 광복절인 15일 오후 축구 결승전이 치러지고, 이어 동 대항 팔씨름으로 대회는 끝난다. 이날 시상식을 한 뒤 면민들은 각자 마을로 돌아가 밤늦도록 잔치를 벌인다.

포항=송의호 기자
사진=프리랜서 공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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