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블레어 "EU 헌법안 2005년 국민투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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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20일 의회에서 유럽연합(EU)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블레어는 지금까지 야당에서 주장해온 국민투표에 반대해 왔다. 영국 언론들은 "블레어의 정치 경력에서 가장 큰 유턴"이라고 평가했다.

블레어가 국민투표를 반대한 까닭은 부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EU 지지율은 28%에 불과했다. 영국인들은 대영제국의 주권이 외부세력(EU)에 의해 침해된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해 한다. 열렬한 유럽통합론자인 블레어는 EU의 선봉을 자부해 왔다. 따라서 국민투표 대신 집권 노동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하원에서의 비준을 선호했다.

그런 블레어가 마음을 바꾼 것은 국내정치 사정 때문이다. 6월 유럽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를 해야 하고, 내년 봄엔 총선을 치러야 한다.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비난에도 불구하고 경제사정이 좋다. 따라서 현재로선 블레어의 3기 연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 그런데 야당인 보수당이 EU 헌법안의 국민투표를 주장하면서 여론을 타왔다. 야당의 주장을 막무가내로 무시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블레어는 여기서 국민투표를 받아들이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대신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국민투표를 내년 총선 이후에 실시하는 시간벌기 작전이다. EU 헌법안은 이르면 6월 말 확정된다. 블레어는 이 확정안을 의회에서 먼저 검토하고 비준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후 찬반 캠페인을 통해 헌법안의 내용을 국민에게 알린 다음 국민투표를 하자는 주장이다. 국민투표는 내년 10월께로 예상된다. 그 사이 총선은 국민투표라는 폭탄 없이 치러지게 된다.

블레어의 국내정치용 승부수에 뒤통수를 맞은 곳은 EU다. 당장 유럽의 좌장 프랑스가 몹시 불쾌해 하고 있다. 영국처럼 EU 반대여론이 높은 프랑스인지라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국민투표를 피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블레어의 돌변으로 국민투표를 무작정 회피하기 어려워졌다. 유럽의회 부의장 잉고 프리드리히(독일)는 "EU 주요국 정부의 수반이 국내정치적 사정으로 헌법안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블레어를 비난했다.

이미 EU 내 7개국은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대부분 작은 나라(룩셈부르크.아일랜드.네덜란드.덴마크)이거나 EU에 우호적(체코.스페인.포르투갈)이다. 만장일치제에 따라 헌법안은 25개 회원국 모두가 동의해야 발효된다. 최악의 경우 EU는 헌법 발효를 위해 극소수 비준 거부 국가를 내쫓을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이나 프랑스를 내쫓을 수는 없다. 블레어의 결정에 전 유럽이 시끄러운 까닭이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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