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4.11총선>3.지구黨조직 모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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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서울 양천을의 신한국당 구본태(具本泰)위원장이 조직책 임명장을 달랑 들고 지역구를 찾아간 것은 선거를 두달여 앞둔 2월3일.이미 공천탈락한 전임위원장이 당간부와 사무실은 물론 집기.
당원명부,심지어 전화기까지 고스란히 챙겨 자민련으 로 이적한 후였다. 남아있는 동협의회장 10명을 간신히 모은 具위원장이 의욕적인 제안을 던졌다.『나도 돈을 낼 테니 우리가 십시일반으로 모아 우선 지구당사무실부터 구하자』는 말을 꺼내자 분위기는일순 썰렁해져버렸다.
具위원장은 그뒤 『내가 얼마나 우스꽝스런 얘기를 했는지 아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토로했다.퇴직금 2천5백여만원을 털어 혼자 힘으로 40평 사무실을 갖추자 『여당 지구당사는 한 백오십평은 돼야 한다』『여당 위원장이면 빌딩주인한테 으름장 한번만 놓으면 될 걸 갖고…』는 등의 투정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국민회의의 한기찬(韓基贊.양천갑)위원장은 색다른 「지구당변형 실험」을 시도하다 현실의 높은 벽에 주저앉은 경우.지구당원들을 상대로 정치발전 심포지엄을 열어보겠다며 사무실 인테리어를 바꾸고 노래방 기기와 원두커피 세트.서가 등을 갖 춘 뒤 첫번째로 1개동 당원 2백명을 초청했다.
그러나 나타난 당원은 8명에 불과했다.민망해하는 그에게 한 고참간부는 『뷔페라도 차려놓으면 30명쯤 모일 것』이라고 귀띔했다.韓위원장은 그후 『결과를 보아 건물 1층에 카페식 사무실을 차려 지구당 토론을 활성화한다』는 당초 구상을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당락(當落)을 불문하고 총선현장에 나섰던 대다수 신인후보들은자신이 접했던 현 지구당 조직을 『거대한 모순덩어리』로 규정했다.구본태위원장은 『고참병장들이 그득한 내무반에 신참소위가 찾아간 심정』이라고 했고 한기찬위원장은 『사전에 알았다면 정치입문을 재고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이 현 지구당 조직의 문제점으로 첫손꼽는 현상은 선거기간은 물론 평상시의 엄청난 지구당 조직관리비용이다.김학원(金學元.신한국당.성동을)당선자는 94년3월 조직책을 맡은 직후 평소한달 최소 2천만원,최대 4천여만원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고고백했다.상근직원 7명의 급료.보너스와 사무실 유지비용만 최저2천만원에 문화행사.당원단합대회를 치르면 4천만원 이상은 족히소요됐다는 게 그의 설명.당시 1년 후원회 수입은 7천만~8천만원이 고작이었고 나머지는 변 호사 수입을 모두 털어부어야 했다고 한다.
선거전에 들어서면 이같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는 제어가 불가능해진다.김문수(金文洙.신한국.부천소사)당선자는 『돈 단위에 따라서 지구당원 움직임의 강도가 달라지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박성범(朴成範.신한국.서울중)당선자는 『한동에 30여명씩 18개동의 운동원을 관리할 경우 하루 5천만원의 계산이 나와 아예 돈을 안쓰겠다고 했더니 30%를 넘는 1백80여명의 지구당원이 손을 털고 사라져버렸다』며 돈과 지구당 조직 간의 함수관계를 전했다.
돈을 붓지 않을 경우 이들 조직은 순식간에 적극적인 반대파로변해버리기도 하며 일부 조직에만 손을 쓸 경우 당장 소문이 퍼져 운동 보이콧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결국 방만한 지구당 조직의그물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영원한 수렁에 빠 지게 되는 셈이다. 유권자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지구당 구성원들의 수준과 구태의연한 사고방식도 신인들을 괴롭혔다.평시에는 오랜 정치꾼들의 한담과 민원중개장소로,선거철에는 떡고물을 챙기려는 브로커들로 북적대는 모습은 4.11총선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
***별 직업없는 선거꾼들 백용호(白容鎬.신한국.서대문을)위원장은 『별다른 생업없는 지구당 일부 간부들은 넥타이를 맨 일반유권자 의식에도 못미쳐 주민들의 냉소만을 초래했다』고 한다.
소위 「동네 떠벌이」「조기축구회 왈왈이」「시장 이빨」「동 빠꼼이」등으로 분류 되는 지구당내 선거꾼들에 대해 김문수당선자는 『한표가 아쉬운 상황에 외면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김영춘(金榮春.신한국.광진갑)위원장은 『새로운 의견을 내 수십년 지구당 간부들과 갈등을 빚을 경우 당장 「젊은 놈이 건방지다」는 비난에다 「당선되나 보자」는 음해가 이어지게 마련』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새로운 모델 요구 높아 자연히 총선이 끝난 직후부터 지구당 조직의 모순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탈바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강삼재(姜三載)신한국당 사무총장은 최근 『방만한 현행 지구당조직은 더이상 곤란하다는 게 현장의 의견』이라며 공화당부터의 오랜 지구당모델 개혁 의지를 드러냈다.
현장을 잠시 빠져나온 대다수 정치인들도 『여야합의로 선거때만대책본부를 구성하고 평시엔 해산하는 미국식 검토』(金榮春),『홍보물 대폭 허용,공청회와 지역케이블TV의 적극 활용으로 지구당기능의 점진적 대체』(金文洙),『여야가 지역 공조직을 서로 없애면 상쇄 가능』(朴成範)등의 정당법개정 주장을 적극 펼치고있다. 이밖에 『정상적 직장인의 시민봉사활동 본부로 모델 변경』(白容鎬),『의정활동 수준의 대폭 강화에 의한 지구당기능 쇠퇴』(韓基贊)등 아이디어가 속출하고 있다.「거대 공룡」내지는 정치인에게 필요악으로 군림해온 지구당이 점차 사멸(死滅 )의 길을 걸을지 여부는 정치권의 의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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