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북한에 시간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 2월8일자 뉴욕타임스에는 북한 외교부 관리가 군부의 강경파를 비판하는 뜻밖의 기사가 하나 실려 그 의미를 놓고 해석이 구구했다.외교부 부부장 최수헌(崔守憲)은 군부의 반대 때문에 외국에 대한 수해구호물자의 요청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북한이 수해로 악화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정부와 구호기관에 긴급원조를 요청할 때부터 군부 강경파는 그것이 주체사상(主體思想)에도 위반되고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사정이 워낙 급해 당(黨)과 외교부의 개방파 주장대로 외국의 구호물자를 받아들이다가 사태가 다시 반전(反轉)된 것으로 보였다.
북한 내부의 강온(强穩)세력간 견해차는 잘 알려진 일이었다.
그러나 외교부의 고위관리가 구호물자 제공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명의 외국인을 상대로 군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異例的)인 일이었다.
그것은 그때로서는 군부 강경파의 입장이 대외정책에 크게 반영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미국이 평양에 두게 되는 연락사무소에 보낼 외교행낭을 판문점을 통해 보낸다는데 외교부가합의한 뒤에 군부의 반대로 그런 합의 자체가 무 효가 되고,그결과 연락사무소 설치가 늦어지고 있는 것도 군부가 외교부의 발목을 잡은 경우의 하나다.지난달 북한이 느닷없이 휴전협정체제의준수를 거부한다면서 판문점에서 기행(奇行)을 저지른 일도 이런큰 시야에서 보면 이해될 법도 하다.
지난 22일에는 북한 정무원 대외경제협력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정우(金正宇)가 북한은 이제 사회주의시장(市場)의 잿더미에서 세계의 자본주의시장으로 이행하는 야심적인 계획에 착수한다고 선언했다.그는 워싱턴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연설하면서 사회주의시장이 붕괴했다는 말을 세번이나 하고 어떤 나라도 국제적인 경제협력체제에서 고립되는 것은 시대착오(時代錯誤)라고까지 주장했다.
세계시장을 하나의 통합된 자본주의시장으로 보는 김정우의 말은북한이 미국을 포함한 넓은 세계의 시장을 외면하고는 지금의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이것은 중국이나 베트남 사람들의 말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베트남과 중 국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모델을 제시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사회주의라고 강변(强辯)한다.
김정우가 북한 지도부 전체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워싱턴에서의 활동목표가 미국의 북한에 대한 시각을 유리하게 유도하는데 있음을 감안해도 그의 발언은 판문점에서 북한 군인들이 벌인 시위와는 또 다른 북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속단을 경계하면서도 그의 말에 의미를 주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아시아.태평양지역 전체의 지각구조(plate tectonics)가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대만해협의 위기,미.일(美.日)안보관계의 강화,내년 7월 홍콩의 중국반환,미국의 장기적인 아태(亞太)군사전략 등은 한가지 조건만 충족 되면 이 지역도 냉전의 무거운 외투를 벗고 21세기를 맞을 수 있다는 희망을 부추긴다.그 하나의 조건이 4자회담 성사를 통한 한반도의평화정착이다.
한국과 미국은 지금의 상황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해결방안을 제시한 것이다.그러나 북한에 시간여유를 줘야 한다.그들도내부적으로 상당한 정책토론이나 심지어 노선투쟁을 거쳐야 할 것이다.「2+2」중에서 국내용인 앞의 부분(남북대 화)을 너무 선전하지 말고,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낸다」는 투의 저속한 표현도 피하고,공은 북한의 코트로 넘어갔다는 식으로 압박도 하지 말고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동시에 중국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헤이그에서 첸치천(錢其琛)외 교부장이 한 말을 보면 중국이 아직은 4자회담에 대한 지지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것 같다. (국제문제대기자.상무) 김영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