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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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듣는 일이 존재의 이유”

“분명히 와본 것 같은 느낌 있잖아요. 그러면서 ‘내 것이다’라는 느낌,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발견됐다는 느낌 말이에요.”

고2 때 신문에서 본 실크로드 사진 한 장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시인은 기어이 비단길을 밟고야 말았다. 그곳에서 송재학은 마치 전생에서 본 듯한 풍경들을 여럿 마주쳤다고 했다. 그 경험을 두고 “풍경과 나와의 연대감”이라고 말한다. 본디 내면에 있었던 것들이 들리고 보일 뿐이라는 얘기다. “개울물 소리가 내 마음에 있으니까 그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그렇게 여행과 일상에서 마주치는 풍경들에 느끼는 연대감은 곧 시가 됐다. “송재학은 정지된 풍경 속의 어떤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탁월하다. 그런데 그 움직임은 이미 주체의 내면에 있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소리族’에서도 그 특징은 드러난다. 소리는 본래 바깥에서 나서 내게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시인은 그것이 원래 내 안에 있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귓속에서 이미 “소리족들은 오래 살림하며 번식해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 귀의 소리와 꽃의 소리, 즉 내부의 소리와 외부의 소리는 하나의 악기가 되어 함께 공명한다.”(이광호 예심위원) 그렇게 ‘연대’하고 있으니 세상을 향해 불평쯤이야 할 수 있어도 증오하거나 해를 가할 수는 없다. 이를 두고 문학평론가 박수연은 시집 『진흙 얼굴』해설에서 “그의 시는 싸움의 앞면을 보지 않고 뒷면의 상처를 감싸 안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소리’일까. 세상을 어루만지는 그의 감성은 왜 주로 청각에 의존하고 있는 걸까. 시인의 답은 짧다. “소리는 그 존재를 느끼는 일이니까요.” 대상을 바라보고, 만지고, 냄새 맡는 대신 주파수를 맞춰 ‘듣는 일’은 그 존재를 완연히 느끼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소리의 운동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소리의 어미는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불꽃 속에서 똬리를 틀’고(‘징’), 소리가 태어날 때의 고통스러움은 ‘담금질에 겨우 눈뜨며 풋울음 하나가 여린 잎새처럼’(‘징’)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태어난 소리는 때로 ‘살점 없이 야위기도’(‘목성과의 대화’) 한다. 그의 언어를 거쳐 소리는, 애면글면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이 된다. 문혜원 예심위원은 “소리를 시각화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풍경 안에 시인이 들어가서 생명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등단 20년이던 2006년 처음으로 낸 시인의 산문집 『풍경의 비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젊은 날,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방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책을 가득 쌓아둔 선배의 방을 한없이 부러워하던 그가 처음 방을 갖게 됐을 때 “방과 길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단다. 시인의 깨달음은 이렇다. “방은 어디론가 숨어야 한다. 방에는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무거운 커튼이 드리워져야 한다.”

옳다. ‘나만의 방’ 없이는 풍경을 들일 곳이 없다. 소리족들이 살고 풍경의 비밀이 숨어있는 곳, 그 방이 문득 궁금하다.

글=임주리 기자, 사진=이병률 시인



“정형화된 글 쓰기 부수고 싶었다”

포주였던 노인이 유서를 쓴다. 그러나 ‘나는 포주였다’는 한 문장 이후론 도통 글을 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포주였다’는 문장이 소설에서 무한 반복된다. 일반적인 글쓰기 원칙에서 같은 문장의 반복은 금물이다. 그러나 김태용의 작품에선 예외다. 사실 그가 작품을 구상하는 첫 단계부터 여느 소설가들과는 다르다. 개요나 줄거리가 아닌, 문장이나 단어에서 시작된다. 이번 작품은 ‘나는 포주였다’는 문장에서 출발했다.

“오랫동안 습작 노트에 써왔던 문장이에요. 그 문장에 문맹이던 사람이 죽기 전에 언어를 배우면 무얼 제일 먼저 쓸까, 란 아이디어가 배치돼 이 소설이 나왔죠.”

그는 습작 시절 소설이 아닌 시를 썼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시의 속성과 부딪히며 스파크를 일으킨다.

“소설은 부술 게 많아요. ‘소설은 이래야 한다’는 학습과 교본들에 질렸거든요. 소설 뿐 아니라 세상도 그렇게 억압적이고 정형화돼 있죠. 그런 것에서 벗어나고픈 욕구를 글을 통해서 실현하고픈 욕망이 있어요.”

포주의 이름은 ‘이병춘’이다. 익명이던 이름은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드러난다. ‘이병춘’은 김태용의 소설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주인공들은 항상 이름이 없다.

“익명성을 위해 일부러 이름을 안 쓰는데, 이번엔 언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게 이름이니까…. 이름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거죠.”

소설 속 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다. 김태용의 작품에선 ‘아버지의 부정(不定)’이 어떤 형태로든 등장한다.

“혼자일 수밖에 없는 실존적 문제를 생각하기도 했고, 아버지 없는 세대와 이름 없는 세대의 운명에 대한 쓸쓸함을 나타내는 장치이기도 해요. 한국 역사를 축약적으로 스케치했죠.”

글을 배운 노인은 언어의 포주가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언어의 포주가 아닌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언어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건 작가도 마찬가지다.

“포주가 여자들을 끊임없이 팔아넘기고 소비하듯, 작가도 언어를 캐치해 끊임없이 소비하고 반복하는 게 아닌가…. 육체적 욕망과 정신적인 글쓰기의 욕망이 배치된 거죠.”

언어는 요물이다. 소통에는 언어만한 게 없음에도 말로 풀어내는 순간, 어느덧 진실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으니. 김태용은 언어란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작가다. 인간의 말이란 게 돼지 소리와 다를 게 뭐냐는 듯 “퀠퀠퀠 퀠퀠 퀠퀠”거리는 노부부를 등장시키는(‘풀밭 위의 돼지’) 등 독특한 방식으로 언어에 대한 고민을 풀어왔다. 다소 난해한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은 깔끔하고 쿨하다.

신수정 예심위원은 “온갖 서사들이 ‘나는 포주였다’처럼 알고 나면 한 줄의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다는 것, 그게 소설의 힘이라고까지 읽혔다”며 “지적이고 세련되게 언어의 진실을 잡아낸 수작”이라고 평했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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