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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창설 첫 임무는 국방 아닌 치안 … 숙군 겪으며 정예화

중앙일보

입력

대한민국 군대 창설의 주역 중 하나인 백선엽(88) 전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을 찾았다. 한국군 창설을 준비하던 미 군정이 45년 12월 5일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장교 양성기관인 군사영어학교(군영)가 있던 자리다. 군영은 1946년 5월 1일 국방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가 생길 때까지 110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이들은 수주 동안 간단한 영어교육을 받고 각 도에 미군 장교들과 함께 배치돼 군의 모체가 되는 국방경비대의 창설 작업을 이끌었다.

1946년 1월 한국군의 모체가 되는 국방경비대 창설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군정청에서는 국내 치안을 반석같이 하고자 국방경비대를 국내 각처에 배치하기로 되어 오는 14일부터 경기도 국방경비대원을 모집하기로 되었다…. 소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21세로부터 30세까지의 청년으로 몸이 건강하고 특히 군대훈련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원을 할 수 있다….”(46년 1월 12일 ‘조선일보’에 실린 ‘나오라! 치안의 전위로’라는 기사의 일부)

우리 군 최초의 장교와 사병은 이렇게 미 군정이 만든 울타리 안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당시 군인이 되기 위해 손을 든 이들에게 주어진 일은 국방이 아닌 경찰의 국내 치안 유지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군정은 군대 설립 계획을 보고했지만 미국 정부가 반대하자 우선 경찰 예비대 성격의 군사력 건설에 나섰다. 『창군(創軍)』의 저자 한용원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건국 과정에서 국방을 책임질 물리력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며 “미 군정이 한걸음 물러난 것은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통일정부 수립 방안이 논의 중인 상황에서 국방군 창설이 소련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전략적으로 ‘주변 지역’에 불과한 한국에서 국방보다는 군정 수행을 위한 치안 문제를 우선 과제로 여겼다”고 덧붙였다.

◇장교와 사병의 탄생=해방 직후 전국에는 일본군들이 버리고 간 무기들로 무장한 사설 군사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들의 정치색은 좌우로 다양했다. 45년 11월 군정청에 등록된 단체만도 30여 개나 됐다. 저마다 건군의 주역의 되겠다고 뭉친 이들이었지만 좌우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유혈사태를 빚기도 했다. 미 군정은 46년 1월 국방경비대를 창설하면서 이들의 활동을 전면 금지시키고 개인 자격으로 지원자를 받았다.

이들 중 광복군 출신은 정통성을 평가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입대를 외면하고 청년단체 활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 바람에 상대적으로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들에게 열린 문은 넓어졌다. 초기 군 고위직 대부분이 이들의 차지가 된 배경이다. 광복군 출신의 입대가 본격화된 것은 정부 수립 이후다.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는 “미 군정은 군 유경험자 중 영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고 미군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느냐를 장교 요원 선발의 우선 기준으로 삼았다”며 “광복군 출신들은 입대 후에도 민족주의적 배타성 때문에 미군과 잘 융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초창기 군대는 먹는 것이 해결된다는 이유만으로도 인기였다. 49년 초 수도경비사령부에 입대한 김종선(78)씨는 “군대 가면 밥은 먹는다고 하니까 온 사람이 많았다”며 “군화는 미군이 쓰다 버린 것이어서 맞는 게 없었고 보병부대는 보급이 달려 고구마나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다반사였다”고 당시 군 분위기를 떠올렸다.

사병들은 지역별로 신문광고와 가두홍보를 통해 모집했다. 정부 수립 직후까지도 정부에 충성한다는 단순한 선서만으로 입대할 수 있었다. 군의 이념 등에 대한 정신교육은 엄두도 못 낼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군은 우익 청년단체 출신들의 등용문이 되기도 했지만 46년 5월 조선공산당의 위폐 발행 사건 이후 사실상 불법화된 좌익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숙군 …‘대한민국 군인’ 만들기=군내로 옮겨붙은 좌우 갈등은 군과 경찰의 마찰, 극도로 악화된 군내 급식 사정 등과 뒤얽혀 폭발했다. 14연대 내 좌익 봉기로 시작된 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과 11월 2일과 12월 6일의 대구 6연대 반란사건 등이 이어졌다.

군 내부의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 불가피했다. 숙군(肅軍)이 시작된 것이다. 여순사건 직후 시작된 숙군으로 48~49년 파면된 장교가 242명, 불명예 제대한 사병은 4133명이나 됐다. 48년 당시 육군 총인원(5만여 명)의 10%에 육박하는 큰 숫자였다. 54년 10월 7차 숙군이 마무리될 때까지 국가보안법에 따라 사법처리된 사람만 군인(1120명)과 민간인을 포함해 1677명에 달했다.

국방부 정보국장으로 숙군을 총괄했던 백선엽 전 총장도 이 과정에서 친구를 잃었다. 최남근 당시 15연대장 이야기다. 백 전 총장과 함께 만주군의 같은 부대에서 일했고 함께 38선을 넘었던 최남근은 여순사건 가담 혐의로 사형을 당했다. 백 전 총장은 “최남근이 언제, 어떤 이유로 좌익에 발을 담갔는지 전혀 몰랐다”며 “평소 청렴하고 강직했던 사람이었는데…”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는 “숙군은 군의 정신적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외과수술이었다”며 “아픔이 있었기에 6·25 전쟁 내내 인민군에 투항하지 않을 수 있었고 군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배영대·원낙연·임장혁 기자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순)=고순철(48년 육군본부 정보국 입대)씨, 김종선(49년 수도경비사령부 입대)씨,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한용원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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