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개방 협상 내달 시작] "협상 앞서 국민 설득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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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전문가들은 다음달에 시작될 쌀시장 개방 협상을 잘하는 것 못지않게 개방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대외 협상보다 대내 설득이 먼저라는 주문이다. 우선 협상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어차피 쌀 수입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리고, 그 다음 개방의 득실을 차분히 따져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쌀시장 개방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을 방치하면 협상이 왜곡되거나 공개된 결과와 실제 내용이 다른 '제2의 마늘 협상 파동'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개방 문제에 대한 대내의 설득에 소극적인 정부의 태도를 '직무유기'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전문가들은 일단 협상에 들어가면 수입 증가 폭을 얼마나 줄이느냐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협상 목표에 대해서는 득실을 따져 시장을 개방(관세화)할 수도 있다는 주장과 일단 개방을 미뤄놓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관세를 높게 붙여도 국내산보다 20% 이상 쌀 것으로 보이는 중국 쌀이 가장 위협적인 상대로 꼽혔고, 농민이 정부를 믿지 못한다는 점을 걱정하는 전문가가 많았다. 쌀 시장 개방 협상을 앞두고 10명의 농업.통상 전문가에게 협상 전략과 향후 대책에 대해 들어봤다.

◇대내 설득이 우선=서울대 정영일(경제학)교수는 "수출국도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유예가 되든 개방이 되든 우리 농업에 미칠 득실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며 "국내 대책을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민승규 수석연구원은 "여차하면 관세화할 수 있다고 상대를 으를 수도 있어야 하는데 정부가 농민의 반발을 우려해 그런 카드를 못 쓸 가능성이 크다"며 "그래서 국내 설득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농촌경제연구원 서진교 부연구위원은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협상이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용규 세계농정연구원장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과정에서 생긴 도시민과 농민 간의 반목을 해소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협상 목표에 대한 의견은 엇갈렸다. "유예냐 아니냐는 기술적인 문제일 뿐"(대외경제정책연구원 최낙균 무역투자정책실장)이라거나 "무조건 지키려 하다 보면 소탐대실(小貪大失)할 수 있다"(한국경제연구원 권영민 국제경제연구센터 소장)는 주장이 많았다. 그러나 "공산품과 달리 다른 나라가 수출 가능한 쌀의 양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의무 수입량을 크게 늘리지 않고 관세화 유예를 할 수 있다"(윤석원 중앙대 산업경제학 교수)는 관측도 있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좀처럼 접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 이는 쌀시장 개방 문제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작업이 어렵고도 시급하다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농촌 자립 기반 갖춰야=쌀 시장을 개방하면 어떤 형태로든 농민의 소득을 보전해 줘야 한다는 데는 공통된 의견이었다. 쌀 재배에서 얻는 소득이 농가 소득의 절반에 이르기 때문에 대책 없는 쌀 시장 개방은 곧바로 농촌 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농촌의 생활기반이 무너지면 빈민 문제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한경연 권영민 소장은 "산업 경쟁력으로만 농업을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며 "농업은 어느 정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국제적으로 공유된 인식"이라고 말했다. 김영래 충북대(국제경영학)교수는 "돕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농민 스스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쌀 산업 내에서 경쟁력 없는 부분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값싼 가공용과 외식용 시장은 포기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가정용 쌀시장에 주력하라는 것이다.(민승규 수석연구원)

반면 급격한 변화에 대한 경계도 있었다. 중앙대 윤석원 교수는 "문제가 있다고 추곡수매제를 당장 없애면 수확기와 미수확기의 가격 차이나 수급 균형을 조절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걱정했다. 그는 농협을 이용해 유통망을 장악하면 외국 쌀의 공세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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