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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표기’는 믿었던 미국한테 뒤통수 맞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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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한민국 외교가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에선 북한의 요구로 ‘10·4 정상선언’ 관련 문구가 의장 성명에 올랐다가 이를 빼는 상황이 발생했다. 미국 지명위원회(BGN)는 한·일이 첨예하게 맞붙은 독도 표기를 놓고 최근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바꿔 정부의 ‘독도 외교’에 구멍이 뚫렸다.

이명박 대통령이 27일 이 때문에 격노하고 정치권에선 관계자 문책론까지 일고 있다. 출범 초 국제 공조를 강조했던 정부가 외교 현장에선 북한의 외교전에 정밀 대응하지 못하고, 국가 현안인 독도 문제를 놓고는 우방의 내부 동향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최악의 외교력을 노출한 때문이다.

◇독도 표기 변경, 뒷북 TF 구성=외교부는 이날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독도 관련 TF를 신설키로 했다. 그러나 미국의 독도 영유권 변경 움직임은 이미 이달 중순 미 의회도서관이 그동안 써 왔던 ‘독도’ 표기를 ‘리앙쿠르 암석’으로 바꾸려 시도하며 감지됐다. 당시 미 의회도서관은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를 리앙쿠르 암석으로 규정하고 있어 이에 일치시킨다는 논리를 명분으로 제시했다.

반면 정부는 ‘사후약방문’ 식으로 26일에야 주미 대사관에 긴급훈령을 내려 ‘경위 파악’에 나섰다. 그래서 지난 14일 미 국무부 대변인의 “(독도 표기 문제는) 한·일 양국 간의 문제”라는 공식 발표만을 믿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이번 미 지명위원회의 결정은 향후 미국은 물론 각국의 지도 제작과 공식 표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의식했던 각국이 미국의 표기 변경을 근거로 일본의 ‘다케시마’ 외교를 따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미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독도에 대한 입장이 바뀔 우려가 크다”며 “일본은 독도가 분쟁 지역으로 국제사회에서 비춰지도록 상당 기간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원상회복’을 천명했지만 미 지명위원회는 주미 대사관을 통해 ‘리앙쿠르 암석이라는 중립적 명칭을 표기한다는 방침’을 알려 왔다. 이 때문에 ‘사전차단’도 못한 정부가 과연 ‘원상회복’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일고 있다.

무엇보다 독도 지명 논란은 1907년 일본 각의가 독도 편입을 결정한 이래 때만 되면 나오는 한·일 관계의 단골 메뉴였다. 역대 외교부는 그때마다 체계적인 대응을 언급했지만 과연 어떤 실체적 노력을 해 왔는지가 도마에 오르게 됐다. 더구나 현 정부는 지난 24일 범정부 차원의 가칭 ‘독도영토관리대책반’ TF를 설치키로 한 바 있어 외교부 TF 신설은 또다시 비판 여론을 비켜 가려는 꼼수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쇠고기부터 독도까지, 계속되는 혼선=정부는 출범 후 대통령 방미 이전 쇠고기 협상을 완료하려다 ‘쇠고기 주권을 내줬다’는 여론의 역풍을 맞으며 촛불집회로 국정 수행 능력에 타격을 입었다. ‘한·미 동맹 강화’를 외교 전략으로 내세웠던 정부가 쇠고기 문제로 미측과 추가협상 논란까지 빚으며 한·미 관계가 결과적으로 삐끗한 모양새가 됐다. 한·일 관계 복원도 정부는 양국 간 뇌관처럼 잠재해 있는 독도와 교과서 문제 등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선언’을 먼저 내걸어 카드를 잃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김기정 연세대 교수는 “한·일 관계는 협력 지향과 긴장이라는 동전의 양면이 함께 가야 하는데 선의를 먼저 보이면 독도 문제를 알아서 해 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다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고 지적했다.

채병건·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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