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없이 北에 당한 외교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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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 01면

24일 발표된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의장성명에서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과 10·4 남북 정상선언 문구가 뒤늦게 삭제돼 파문이 커지고 있다.

ARF 의장성명서 ‘금강산 총격’ 삭제

금강산 사건 해결을 위해 ‘국제 공조’를 하겠다고 천명한 뒤 열린 ARF에서 북한이 펼칠 공세를 예측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없는 허술한 외교로 냉전시대 남북 대결 구도만 드러내 한국 외교의 신뢰를 손상시켰다는 것이다. 박의춘 북한 외무상 일행은 ARF 참가를 ‘공식 방문’으로 전환한 뒤 싱가포르를 상대로 집요한 외교전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ARF 의장국인 싱가포르 정부가 첫날 만든 최초 안(案)에는 이미 ‘10·4 정상회담에 주목한다(note)’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최종 성명안에는 금강산 피격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조항과 함께 북측이 주장하는 ‘10·4 선언에 기반한(based upon) 남북 대화 진전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26일 “최초 안에 ‘10·4’가 들어간 데 대해선 개의치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북 대화를 촉구하는 조건부 뉘앙스가 있는 ‘기반한’ 이란 문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해 고민 끝에 (싱가포르 측에) 수정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북한 측으로부터 이미 금강산 관련 문구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받고 있던 싱가포르 정부는 두 문장을 모두 삭제할 것을 우리 측에 제안했다. 다른 당국자는 “싱가포르와의 우호 관계만 믿고 방심하다 발생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의장성명에 대한 수정 요구, 싱가포르 측의 삭제 제의 수용 과정은 유명환 외교부 장관이 주도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기반한’이란 대목이 기록으로 남아 북측에 빌미를 주는 것보다 아예 삭제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10·4 선언’에 대한 보수층의 부정적 인식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의 교감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이를 ‘망신외교’라고 비판했다. 자유선진당은 “외교안보 라인은 책임을 통감하고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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