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예술의 전당 위창 오세창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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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옛 서예작품 가운데는 잘 써내려간 글씨 사이로 오래된 기와조각 탁본을 찍어놓은 색다른 작품이 간혹 있다.이런 작품은 조선시대 서예사의 끄트머리에 주로 등장한다.
탁본배치로 악센트를 줘 현대적 조형감각마저 느껴지지만 실은 서예와 금석학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 이론을 통해 전통형식을 파괴해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대담한 실험을 행했던 최초의 인물이 구한말의 대서화가 위창(葦滄)오세창(吳世昌.1864~1953)이다.
예술의 전당 서예관(580-1511)에선 연차적으로 열어온 「한국서예사 특별전」의 하나로 지난 12일부터 4월7일까지 오세창전을 개최하고 있다.
오세창은 서화가이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한사람이며 계몽사상가.언론인.감식가로 활동했던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다. 그렇지만 이 전시는 그의 활동중 서예에 초점을 맞춰 서예작품 1백20점,전각 실인(實印) 2백40점을 소개한다.
또 서화가로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고 예술의 뿌리를 가늠케할 자료 1백여점을 덧붙여 선보인다.
자료에는 그의 부친이었던 역매(亦梅)오경석(吳慶錫.1831~1879)의 작품과 중국문인들과 교유했던 서간집,뛰어난 감식가였던 모습을 보여주는 제문(題文)과 발문(發文),그리고 독립선언서 원본같은 그의 유품이 포함돼 있다.
위창은 학문적으로나 서예사적으로 추사파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이는 부친이 추사의 제자였던 우선(藕船)이상적(李尙迪)에게 서화를 배웠고 그가 그것을 가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글씨에는 소위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이라는 추사파 특유의 학문적 깊이나 향기가 배어있다.
고대 중국의 청동기나 석물에 새겨진 전서나 예서를 중요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위창의 글씨는 붓끝이 동그랗게 말려들면서 단조롭다는 평도 있지만 그의 제자인 전각가 안광석(安光碩)옹은 『그것은 단편적인이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특히 전서와 전각에 치중한 위창의 세계에 대해 그는 『미수(眉수)허목(許穆.1595~1682)이래의 제일』이라고 말한다.
그의 학맥은 추사파지만 그 뿌리에서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은 집안에 있던 수많은 소장품 때문이었다.
부친이 소중히 모은 수장품은 위창이 갑신정변에 연루되며 모두흩어졌다.
그러나 거기서 익힌 그의 감식안은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 1천1백17명의 기록을 모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저술로 꽃을 피웠다.
지금도 한국회화사연구의 제1급 자료로 손꼽히는 이책은 이번 전시에도 소개되는데 간송미술관 최완수(崔完秀)연구실장도 『근역서화징 이후에 이렇다할 책이 없다 』고 말한다.또 그점에서 『위창이 작가 이전에 탁월한 감식안을 소유한 미술 사학자임을 밝혀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 면모는 간송(澗松)전형필(全鎣弼)을 도와 일제로부터 한국문화재를 지켜낸데서도 잘 드러난다.감식가로서의 면모는 간송 컬렉션에 쓰여진 그의 발문이 모두 정리된 뒤에나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전시는 추사파에서 시작했으 나 추사를 떠나 스스로 일가를 이룬 위창의 세계를 보여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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