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규 칼럼] '통일 이후 연구소'를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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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회에서 열린 '오늘의 북한'이라는 세미나에 불려나간 일이 있었다. 북한의 권력구조를 비롯해 심각한 경제난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배웠다. 갑론을박도 있었고, 북한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들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토론 내내 나는 혼자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의 북한 실상이 과연 어떤지, 누구 말이 얼마나 옳은지 몰라도 나한테 더 중요한 관심사는 '오늘의 북한'이 아니라 '오늘의 남한'이었기 때문이다. 차례가 돼서 한마디 하긴 해야겠기에 토론회 제목을 '북한문제와 관련된 오늘의 남한'으로 바꿨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소견을 밝혔다.

사실 나는 북한에 한 번 가 본 일도 없고 전문적인 식견도 없다. 핵문제가 어떻고 6자회담이 어찌 전개될지에 대해서도 특별히 아는 게 없다. 어떻든 간에 북한 몰락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으며 아마도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믿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다.

결국 무너지긴 무너지는데,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폭삭할 공산이 크다는 게 문제다. 어떤 형태로든 통일이 됐다 치자.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군은 군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시나리오를 만들어 도식적인 비상훈련을 하고 있지만 그런 걸로는 어림없다. 엄청난 충격과 혼란이 밀어닥칠 텐데 그 일을 감당할 준비나 능력이 과연 갖춰져 있는 건가. 아니 어느 누가 관심이라도 갖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그 막강한 독일조차 통일 이후 부작용을 감당하지 못해 여태 비실거리고 있는가 하면, 베트남은 통일 30년이 돼도 기아에 허덕이고 있음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붕괴의 시나리오는 수도 없이 나왔지만 재건의 시나리오는 보지 못했다. 붕괴에 대한 연구만 하면 뭘 하나. 북한 정권이 망하면서 벌어질 문제들을 어떻게 수습하고 추스를 거냐에 대한 연구와 준비가 더 중요할 텐데 그런 건 별로 눈에 안 띈다. 막상 북한이 망해서 한반도가 통일된다고 치자. 한반도는 난리굿이 날 것이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점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주변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고 눈에 불을 켜고 벌떼처럼 덤벼들 것이고, 중국 같은 나라는 여차하면 북한을 통째로 자기네 땅으로 삼킬 채비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차피 망할 나라이니 핵문제 등에 생색을 내면서 북한 지분을 최대한 확보할 생각이 왜 없겠는가. 일본은 일본대로 통일 코리아를 환영하기는커녕 심각한 위협으로 느낀 나머지 무슨 훼방공작을 펼지 모른다. 미국은 혹여나 북한의 핵물질이 흘러나올 위험성에 더더욱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결국 통일 이후를 감당할 수습 노력과 비용은 남한 혼자 홀라당 뒤집어쓰게 되어 있다. 분단의 비극이 단숨에 씻겨 내리고 찬란한 축복만이 기다릴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반도 전체에 엄청난 지진과 해일이 밀어닥치는 것 같은 대혼란에 빠져들지 모른다. 온 국민이 꿈속에서도 그려온 통일이 막상 잘못 대처해서 새로운 대재앙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지나친 희망론자들만 득세한다. 통일 이후 걱정거리를 거론할라치면 그런 시도 자체를 반통일 행위로 매도하는 분위기마저 팽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날 토론에서도 "북한 노동자에 대한 연구는 많은데 통일 이후의 노동정책이나 노동시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주제 발표자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나도 통일 이후 예상되는 노동문제를 연구해 왔는데, 주변에서 하도 수구 꼴통보수로 모는 바람에 아예 집어치우고 요즘은 북한 노동문제만 연구한다"고 했다. 학자가 연구를 해도 통일의 순작용만 연구대상으로 삼아야지, 통일의 부작용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금기사항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것이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하긴 탈북자 문제 하나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형편이고 비정규직 문제 등을 둘러싼 노동정책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국정능력으로 통일 이후에 당면할 갖가지 정치.경제.사회.복지 문제들을 원만하게 감당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는지 모르겠다. '통일 이후 연구소'라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이장규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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