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체험학습 삼아 선거운동 해볼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서울시 교육감 선거운동이 시작된 1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모 초등학교 학부모회 임원인 A씨는 “차나 한잔 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학교 교장이었다. 그 교장은 A씨에게 “학부모들끼리 밥이나 먹으라”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안에는 현금 10만원과 교육감에 출마한 XXX 후보의 명함 여러 장이 들어 있었다. A씨는 이 같은 내용을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 모임(학사모)’에 제보했다. 30일 첫 민선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1980년대 총선·대선을 연상케 하는 불법·과열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교장·교사가 선거운동=학사모는 ‘교육감 선거 불법·탈법 감시 센터’를 만들어 일선 학교 교장·교사들의 불법 선거운동 사례를 제보받고 있다. 학사모가 22일까지 집계한 제보는 230여 건에 달했다.

제보에 따르면 금천구의 한 중학교 교사는 18일 학생들을 밖으로 불러 모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 후보의 공약 팸플릿을 나눠 주면서 “부모님께 꼭 투표하시라고 해라”고 말했다. “체험학습 삼아 선거운동을 해보자”고 학생들에게 제안해 학생들이 교사의 전화를 피하기도 했다.

용산구의 모 고교 교장은 18일 학부모회 임원들을 불러 “어려울 때 ○○○ 후보를 밀어 주자”고 설득했다. 노원구의 한 초등학교 교장은 “교장들 사이에 전교조가 미는 후보가 되는 것은 막자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교장들이 대놓고 전화를 돌리지는 못하지만 ‘뒤탈’을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가까운 사람들과는 접촉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학사모 관계자는 “신고를 한 학부모들이 자녀의 신분이 노출될까 봐 선관위 고발도 망설이고 있다”고 말했다. 교원이 선거운동에 나서는 것은 공직선거법 위반이다.

지자체와 사교육계도 지원 사격에 나서고 있다. 학사모 측은 “구로구·은평구 등지의 일부 기초단체 의원들이 ‘○○○ 후보가 당선되면 급식시설이나 운동장 등을 만들어 주겠다’고 공약했다는 제보를 접수했다”고 전했다.

◇대선·총선 뺨치는 과열=마포구 도화동에 사는 김수정(35·여)씨는 휴일인 20일 오전 한 교육감 후보의 선거 차량이 내는 확성기 소리에 잠을 깼다. 김씨의 아파트 건물 앞까지 들어온 차량은 15분 정도 유세 방송을 하고 떠났다. 김씨는 “대선·총선 때도 단지 안으로 들어와 확성기를 틀 생각은 못하던데 교육감은 더 무서운 모양”이라고 혀를 찼다. 각 후보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주택가까지 선거 차량이 확성기를 틀어 대 소음공해에 시달린다”는 불만이 매일 올라오고 있다.

중학생 아들을 둔 이정희(38·여)씨는 “하루 5~6통씩 홍보 전화를 받는 학부모도 있다. 신상 정보의 출처를 놓고 정당이냐, 학교냐 등 의견이 분분하다”고 말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불법 여부를 묻는 전화·e-메일이 대선·총선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접수되고 있다. 신상 정보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선관위의 조사 영역이 아니고 전화·e-메일 발송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고 밝혔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의 과열 양상에 대해 김명수(교원대 교수) 한국교육행정학회장은 “서울시 교육감은 ‘교육 대통령’이라 할 만한 자리다. 따라서 정치인을 뽑는 선거처럼 불법·과열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충형·이진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