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정치논리에 닫힌 韓.日협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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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외무부내 일본통들이 일손을 놓고 있다.』 당사자들로서는 발끈할 얘긴지 모르겠지만 기자의 눈에는 적어도 그렇게 비친다.물론 주무부서에는 늘 그렇듯 밤에도 불이 켜져 있다.밥먹듯 하는직원들의 야근에도 크게 달라진건 없다.
『일손을 놓긴 왜 놓습니까.정상회담 한번 하고 나면 할 일이얼마나 많은데….』 지난 2일 태국 방콕 한.일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정리하고 후속조치를 마련하느라 여전히 정신없이 바쁘다는게 외무부의 설명이다.하지만 정상회담이 끝나고 나면 으레하는 문서작업을 관례적으로 하고 있을 뿐이지 산적한 한.일간 현안 을 풀기 위한 외교적 노력 때문에 바쁜 것 같지는 않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성사된 한.일정상회담은 독도문제로 꽁꽁 얼어붙은 양국관계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그러나 꽉 막힌 외교채널이 정상화될 기미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은 이달중 수산당국간 실무협의를 갖자고 제의해 왔다.그러나 정부는 방침조차 못 정하고 있다.
『어족자원 보호문제를 다루는 실무차원의 기술적 협의인데 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은 하면서도 『시기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것이 외무부 당국자의 설명이다.어째서 시기가 문제냐는 질문에는 『대답하기 곤란하다』며 물음 자체를 우문(愚問)으로 돌려버린다.수산당국간 실무협의 개최 여부조차 청와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이런 판에 정상적인 대화채널이 가동돼 양국간 현안에 대한 외교적 논의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면 무리도 여간 무리가 아니다.
배타적경제수역(EEZ)선포를 앞두고 당면과제로 대두된 한.일간 어업협정 개정협상은 빨라야 오는 5월에나 시작될 수 있을 것으로 전해진다.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 해소를 위해 추진중인 역사공동연구위원회 관련 협의도 사실상 중단상태 에 있다.4월이후에나 재개될 전망이다.
한.일간 중요한 외교협상이 모두 4월총선 이후로 미뤄져 있는셈이다.독도문제로 격앙된 국민감정을 표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총선전까지는 양국간 외교채널을 모조리 묶어두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물건너 갈 뻔하던 한.일정상회담을 일본은 물밑 외교채널로 살려냈다.오시마 겐조(大島賢三)외무성 아주국심의관을 비밀리에 파견,무산위기에서 정상회담을 구해냈다.어떤 경우에도 한.일간 대화채널은 유지돼야 한다.정치적 고려에서 대화의 빗 장을 꼭꼭 걸어 잠그기에는 양국이 함께 풀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통일팀 배명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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