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업어다 뉠지 볼기를 칠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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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 연암 박지원은 만년에 병풍에 큰 글씨로 이 여덟 자를 써놓고 “천하의 모든 일이 이 때문에 무너진다”고 말하곤 했다 한다. 인순고식이란 낡은 습관을 따르며 당장의 편안함만 취하는 태도고, 구차미봉은 대충 해치우고 임시변통으로 메우는 수법이다. 제 몸 편한 것만 찾는데 나아지려는 의지가 자랄 틈이 있겠나. 그저 남들이 여태 해오던 것을 따라 하면 된다.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러다 문제가 생긴들 무슨 걱정이 있으랴. 적당히 아랫돌 빼다가 윗돌 괴면 그만인 것을. 원인치료는 새 돌이 필요하니 번거롭다. 그냥 덮어두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굴러가게 마련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

“고얀 놈들.” 어이쿠, 연암의 불호령이 들리는 듯하다. “말만 요란하던 공기업 개혁이 딱 그 모양새가 아니더냐” 하고 말이다. 이 정부 하는 게 죄 그렇지만 용을 그리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뱀 꼬리 감추는 데 급급한 꼴이 가소롭다. 위기관리대책회의라는 것이 우선 그렇다. 경제정책조정회의의 이름까지 바꿔가며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정작 관심은 국가나 국민의 위기가 아니라 정권의 위기 같아 보인다. 촛불 민심에 놀란 가슴, 공공노조 솥뚜껑만 보고도 벌벌 떤다. 세게 밀어붙이다 또 한번 촛불에 델까 겁나는 모양이다. 그래서 엉거주춤 물러서는 게 영락없는 인순고식이다. 그렇더라도 공기업 개혁을 관계부처별로 자율 추진하겠다는 건 가증스럽다. 차라리 안 하겠다고 하지, 각 부처들이 자신들의 퇴직 후 일자리인 산하 공기업에 개혁의 칼날을 들이대는 걸 기대한다면 생선 앞 고양이가 웃을 일이다. 아무래도 구차미봉과 다름 아니다.

인순고식도 위험하지만 구차미봉은 더더욱 위험하다. 대충 꿰매 입은 옷은 얼마 못 가 터지기 마련이다. 그때 천하의 모든 일이 그렇듯 옷 입은 이의 존재이유도 무너지고 만다. 이 정부의 존재이유가 경제 살리기 아니었던가. 게다가 지금은 밖으로 원자재가와 유가가 치솟고, 안으로 성장은 멈추고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위기의 사면초가 형국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고비용 저효율의 대명사인 공기업을 내버려 두고 어디서 우리 경제의 새 성장동력을 찾겠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공공기관운영법상 305개 공기업은 매년 26조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를 한다. 이들이 민영화되면 수돗물 값, 전기 값이 열 배, 스무 배로 뛴다는 게 민영화 괴담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이들의 방만 경영과 도덕적 해이를 보상하느라 수돗물 값, 전기 값의 열 배, 스무 배를 세금으로 내고 있는 건 괴담 아닌 현실이다.

인기 없는 정부의 비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끝까지 인기 없는 정부가 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그것만이 땅에 떨어진 신뢰를 주워담고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는 길이다. 그 후에 절로 따르는 게 인기다. 예쁜 여배우가 망가져야 뜨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경제 살리기의 엔진은 개혁이다. 개혁이 고통을 수반한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 고통이 무서워 덮어둔다면 개혁도 없고 경제도 없으며 이 정부도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격 까칠하기로 소문났던 연암이었다.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백동수가 그를 깍듯이 섬겼다. 그런데 하루는 백동수가 술에 취해 연암 앞에서 주정을 했다. 타일러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연암은 말없이 백동수를 땅바닥에 엎어놓고 볼기 열 대를 내리쳤다. 그날 이후 백동수의 주사가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연암은 이처럼 잘못을 그냥 넘기지 않는 성격 탓에 일생 동안 많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그를 역사 속의 거목으로 우뚝 서게 한 것 또한 그런 기질이었다. 주정하는 사람을 업어다 누일지, 볼기를 쳐서 정신 들게 할지는 이 정부의 선택이다. 하나는 술 취한 사람이 고통스럽고, 다른 하나는 국민이 고통스럽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