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公信力 異常증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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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국가권위를 상징하거나 공신력의 최종보루라 할 중요기관들의 신뢰와 이미지에 흠이 가는 현상들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이라면 통화가치를 책임지는 국가신용의 최후보루라 기관인데 여기서 각종 사고와 실수가 연달아 일어났다.가뜩이나 시중은행들이 취약한 터에 한은(韓銀)마저 이런 권위손상을 겪고 있는 것은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헌법재판소라면 법에 관한 최종결론을 내리는 최고의 사법기관으로,추호도 권위나 신뢰성이 흔들려서는 안될 기관이다.하지만 최근 5.18특별법에 대한 헌재의 결정은 헌법규정이나 법리(法理)로 보아 당연한 것이긴 해도 실제 위헌론이 5대 4로 우세했다는 사실은 국민에게 적잖은 혼란과 회의(懷疑)를 불러일으킨게사실이다.더욱이 위헌의견을 가졌던 한 재판관이 막판에 번의하는바람에 그나마 5대4가 됐다는 소문도 있고 보면 실제로 5.18특별법이 위헌이 아닌가 하는 의심 은 더 현실성을 갖는다.헌재 스스로 그전에 12.12사건의 공소시효는 이미 끝났다는 결정을 내린 적도 있기 때문에 앞뒤 결정이 모순된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이런 일로 일반의 눈에 헌재의 권위가 어떻게 비칠까 하는 걱정이 안들 수 없 다.
성혜림(成蕙琳)씨 탈출사건을 다루는 정부의 자세는 매우 불안하게 보였다.북한의 급속한 붕괴를 바라지 않고 북한을 자극하지않는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방침인데 成씨 사건을 보면 정부가 기본방침보다는 한건주의에 더 사로잡혀 있다는 인상 이 역력했다.
김정일(金正日)에겐 상말로 「미치고 폴짝 뛸 일」인데 金에게 이런 자극을 줄 위험성을 처음부터 계산에 넣었는지,아니면 일단한건 하고보자는 식이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대북(對北)안보사항에 관한한 고도의 프로기능을 가져야 할 기관이 이만한 계산도 안했다면 심각한 문제다.
국회의원이나 경찰관도 공권력을 대표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이지만이제 와서 그들의 범법(犯法)엔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마치 웬만한 교통사고가 이젠 뉴스거리가 아니듯이 의원과 경찰의 범법도자주 보다 보니 만성이 돼버린 것이다.
놀라고 분개해야 빠른 개선책도 나올 수 있는데 이처럼 만성이돼버리면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더욱이 만성이 돼도 견딜만한 대상이 있고,만성이 돼서는 결코 안될 대상도 있다.세상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 곳,사람들이 최종적 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뢰와 권위,이런 것이 있어야 국가와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다.헌법재판소.법원.검찰.한국은행 등과 같은 기관이바로 그런 국가권위의 상징이자 공신력의 최후보루라 할 것이다.
다른 일반 행정기관이나 공공기관이 속세(俗世)의 존재라면 이들은 그보다 한차원 높은 성(聖)스러운(?) 존재다.대북 안보사항에 관한한 안기부도 신뢰의 최후보루가 돼야 할 기관이다.가령 한은도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실수가 있을 수 있다.하지만한은의 실수가 누적되고 그런 일이 만성이 돼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또 안기부의 대북 기능이 잘못 작동되는 일이 만성이 된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기관들이 나사가 풀려 제구실을 못하거나 권위와 공신력에손상을 받는다면 국가의 권위와 기강이 설 수 없다.그런 점에서우연이든,고의든 국가공신력의 중추기관들에서 벌어진 실수나 과오,또는 이미지 실추는 결코 가볍게 보거나 그냥 넘어가선 안될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문제에 관한 정부 스스로의 인식이부족한 것 같고 해당기관들한테서도 뭔가 만회해보려는 노력을 보기 어렵다.
지금 총선을 앞두고 정부의 관심이 온통 선거에 가 있고 그 바람에 중요기관에서 나사가 빠지거나,나사가 빠져도 죄지 못하는현상이 없는지 생각해볼 일이다.그리고 권위와 자존심,철저한 프로의식을 가져야 할 중추적 기관들이 시류(時流) 에 휩쓸리고 적당히 타협하는 기풍이 없는지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이상 회복 불가능한 최종선(最終線)의 실수나 신뢰추락이 일어나선 안될 일이다.최후보루에서의 과오나 실수마저 만성이 돼버린다면 국가 전체의 공신력이 흔들린다.만성의 점진적 확대현상이최후보루에까지 이르는 일은 결단코 막아야 한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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