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나 떨고 있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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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개봉이 임박한 한국 영화 '범죄의 재구성'을 놓고 한국은행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물가안정과 화폐발행을 책임지는 중앙은행이 어처구니없는 사기를 당한다는 영화의 스토리 설정 자체가 마땅찮은 데다 '모방범죄라도 생기면 어쩌나'하는 근심까지 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은의 황명관 안전관리실장은 "최근 본점과 16개 지역본부에 영화와 흡사한 범죄를 도모할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하라는 지시를 내려보냈다"고 말했다. 지난주부터는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해 은행 출입자에 대한 통제와 검색을 강화한 것은 물론, 은행 내 거액의 현금이 오가는 장소엔 실탄을 넣은 기관총까지 설치했다.

또 만일의 경우 무슨 일이 터지면 경찰이 3분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최상급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이 영화에 대한 한은의 거부반응은 영화제작 때부터 표면화됐다. 지난해 영화제작사가 한은의 서울 강남지점을 촬영 장소로 쓰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한마디로 거절했다. 국가정보원과 동급의 국가보안목표 시설을 촬영지로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은은 영화에 '한국은행'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도록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낼 생각도 했다. 하지만 미국 영화 '다이하드 3'에서 미국 뉴욕 연방준비위원회 지하금고가 털리는 내용이 들어간 전례가 있는 데다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법률자문을 듣고 꾹 참았다. 대신 '한국은행이 털렸다'식의 자극적 광고카피는 삼가달라고 당부했다.

한은의 김두경 발권국장은 "수년 전부터 금융사들이 한은에서 돈을 인출할 때 수표를 주고받지 않고 전산으로 처리한다"면서 "위조수표로 사기를 친다는 영화의 줄거리는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허구"라고 말했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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