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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국가 생존전략, 공론화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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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중국 상하이(上海)는 자주 들르기도 하였지만 이번에는 아예 자동차로 직접 인근 시골을 둘러보고 싶었다. 한국의 국가발전전략이라는 것이 미국·일본·중국이라는 인근 강대국과 떨어져 모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를 고민하며 둘러보는 작업이었다.

동양의 뉴욕을 기치로 내걸며 날로 발전하는 상하이는 그렇다 치고, 옛날에는 도로망이 엉망이어서 접근조차 어려웠던 시골도 이제는 고속도로가 휙휙 뚫려 어지간한 도시는 대도시에서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항저우(杭州)·쑤저우(蘇州)·우시(无錫)같이 이미 도시화된 인근 거대 도시들은 각각 공업도시와 상업도시, 그리고 역사문화도시의 면모까지 갖춘 모습으로 터를 잡아가고 있었고, 양쯔(揚子)강 하류의 삼각주에는 옛날 수로로 번성했던 저우좡(周庄), 퉁리(同里), 시탕(西唐) 등과 같은 마을들이 구진(古津)이라는 이름으로 ‘동양의 베네치아’ 운운하며 유적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오랜 역사와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었다. 중국의 강남 도시야 어디인들 손만 대면 관광지가 되는 곳이 아닌가.

길고 긴 서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남쪽에서부터 동북 3성의 적지않은 도시에 이르기까지 산업의 동맥이 강건하게 뚫려지고 있었다.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 역사도 중국의 역사로 우기는 그 땅, 옛 고구려 땅인 동북 3성의 지역에도 시멘트 공장·탄광·화력발전소·거대한 산업단지들이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사통팔달로 도로망 뚫리는 것이 내 눈에는 시추공마다 석유가 펑펑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백두산 아래까지 발 빠른 미국 호텔체인이 들어서 있고, 곧 공항도 개설될 예정이다. 남북이 갈등하는 상황을 틈타 비행기로 드나드는 백두산관광까지 중국이 본격적으로 선점하겠다는 것이다. 그 상술에 헬기로 천지를 내려다 보는 헬기투어도 곧 상품으로 나올 것 같다.

도로망이 뚫리고 지역마다 공업·농업·상업 도시들이 발전하고 숙박시설까지 완비되면 그 다음은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이 너나 할 것 없이 공항에서 렌터카를 빌려 넓은 중국을 누비고 달릴 것이다. 그동안 유럽과 미국을 달렸듯이. 나의 상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광둥(廣東)·난징(南京)·상하이·베이징(北京)·선양(瀋陽) 같은 거대 도시에 세계적인 뮤지엄과 테마파크들이 유치될 것이고,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는 세계 일류 대학들이 중국 대학과 손잡고 중국에 분교를 속속 세워 연구와 교육을 주도해갈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자를 앞세워 인류공영의 이념을 확산시키고 있는 중국은 동양의 패권자로 등극하게 될 것이다. 개혁개방이 중국 사회주의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아시아에 거대한 블랙홀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일본도 이를 두려워하며 대응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의 교육이 엉망이 된 구렁텅이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 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호주로 나가고 있지만, 중국이 이쯤되면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가까이에 있는 중국으로 몰려가게 될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보다 중국에서 교육·문화·역사·음식·예술·주거 등이 저비용으로 해결된다면 누구나 앞다퉈 나갈 것이다. 영어와 동시에 중국어가 붐을 이루게 될 것이고, 이미 내팽개친 우리의 한자는 중국어로 대체되고, 한글은 영어와 중국어를 표기하는 발음부호 정도로 전락할 수도 있다. 국내 대학은 학생과 경쟁력을 잃고 기진맥진한 상태에 빠질 우려가 있다.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이 이 지경으로 내몰리게 되면 우리의 문화는 어떻게 될까. 영어와 중국어가 맹위를 떨치고 중국이 블랙홀로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자국어가 맥을 못 추게 되는 상황에서 경제력까지 후퇴하게 되면 우리의 얼과 한국 문화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것에 대비하는 것이 장기 전략 아닌가.

정부는 장기 전략도 없이 단기 정책에서도 우왕좌왕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미래 한국이 발전해 나갈 국가의 성장동력은 어디에 만들어지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이 시대 리더십의 패턴과 권위체계의 구조도 분명하지 않다. 이제는 정부만 쳐다보지 말고 우리 사회가 활발한 공론의 장을 통해 국가의 생존전략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정종섭 서울대·헌법학

◇약력: 서울대법대 졸업,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법학박사(연세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 서울대법대 교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