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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 밀린 돈 7조 ‘폭탄 돌리기’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신용카드업계가 연체 관리를 위해 도입한 리볼빙 서비스가 잠재적 ‘부실 폭탄’이 되고 있다. 신용카드사들이 외형 확대를 위해 이 서비스를 무분별하게 운영하면서 그 규모가 위험수위를 넘어선 탓이다. 금융전문가들은 경기침체가 본격화할 경우 리볼빙 서비스가 2003년 카드대란에 맞먹는 심각한 경영불안 요인이 될 것으로 우려한다.


의류도매상을 하는 K씨는 최근 카드 돌려 막기에 정신이 없다. 사연은 이렇다. 연초 카드 빚 700만원을 갚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그는 카드사 직원의 제안으로 리볼빙 서비스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매달 카드 빚의 10%만 갚으면 연체도 면하고 신용도도 관리할 수 있다는 말에 앞뒤 안 가리고 서비스를 이용한 것.

▶리볼빙 서비스 잔액이 급증하면서 ‘카드 대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경기가 나빠져 장사가 안 되고 소득이 줄자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불과 3개월 만에 카드 빚은 1200만원으로 늘어 카드 이용한도마저 꽉 채우게 됐다. 리볼빙 결제 금액과 생활비 등을 충당하기 위해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으면서 빚만 더 늘어난 것이다.

그는 “카드사 직원 말만 믿고 ‘조금씩 갚으면 되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살림살이가 빠듯할 정도로 벌이가 줄어들면서 결국 임시방편으로 현금서비스를 이용하게 됐고, 이제는 이용한도를 초과해 다른 카드로 돌려 막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현재 K씨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카드 빚을 갚기 위해 집을 담보로 대출 받는 것을 고려 중이다.

최근 리볼빙 서비스가 카드사들의 심각한 경영불안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신용카드사들이 경기 동향이나 고객의 채무상환 능력과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리볼빙 서비스를 확대하면서 관련 부채(리볼빙 서비스 이용잔액)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특히 K씨처럼 경기 침체에 따른 가계소득 감소가 현실화하면서 리볼빙 서비스가 ‘부실 폭탄’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경기 악화→가계소득 감소→채무상환 능력 저하→리볼빙 서비스 연체→신용카드사 경영 부실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과 신용카드사 등에 따르면 리볼빙 서비스 가입자와 잔액은 매년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월 말 현재 리볼빙 서비스 가입자는 1000만 명이 넘었다. 올 들어서만 120만 명이 증가해 3월 말 현재 1100만 명이 리볼빙 서비스에 가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가 4800만 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국민 4명 중 1명가량은 리볼빙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셈이다.

리볼빙 서비스 잔액, 즉 고객 부채는 7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월 말 현재 리볼빙 서비스 잔액은 6조9000억원가량으로 전년 말(6조5000억원) 대비 9.4% 이상 증가했다. 불과 3개월 만에 4000억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2006년 말 리볼빙 서비스 잔액은 4조2000억원이었다.

리볼빙 서비스 잔액이 급증하면서 전체 신용카드 이용잔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졌다. 3월 말 현재 신용카드 이용잔액은 약 64조원으로 이 중 리볼빙 서비스 잔액 비중은 10%가 넘는다.

리볼빙 서비스 가입자와 잔액이 급증한 것은 신용카드사들의 과당경쟁이 원인이다. 최근 신용카드사들은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써가면서 치열한 카드 발급 경쟁을 벌이고 있다. 비씨, 신한, 삼성, 현대, 롯데카드 등 5개 카드사가 1분기에 쓴 영업비용은 총 2조4979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31% 증가했다.

이처럼 과당경쟁을 벌이면서 카드 발급 수도 다시 9000만 장을 돌파한 상태다. 일부 신용카드사는 카드 발급을 미끼로 리볼빙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하거나, 심지어 고객에게 제대로 고지도 하지 않고 리볼빙 서비스에 가입시키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김규생(35)씨는 “지인의 부탁으로 카드를 발급받았는데 신청도 안 한 리볼빙 서비스에 가입돼 있었다”며 “카드사에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문의하자 카드 사용액의 5%만 결제하면 나머지 금액은 연체 없이 자동으로 연장되는 좋은 서비스라며 사용을 권했다”고 밝혔다.

특히 최근 경기 악화로 당장 카드 빚을 갚지 못하는 고객이 느는 것도 리볼빙 서비스 잔액이 급증하는 데 한몫한다는 분석이다. 신용불량 등 연체로 인한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리볼빙 서비스를 통해 ‘일단 상환기간이라도 연장하고 보자’는 서비스 이용자가 늘고 있는 것이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리볼빙 서비스는 고객의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을 해결하고 신용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라며 “소득이 불안정한 일부 고객이 카드 빚 갚기가 힘들어지자 리볼빙 서비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리볼빙’ 연체율에도 안 잡혀

문제는 리볼빙 서비스가 신용카드사는 물론 개인에게도 잠재적 부실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 입장에서 리볼빙 서비스는 자금 부담 없이 카드 빚을 갚아나갈 수 있고, 당장 연체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소득이 불안정해지거나 상환계획이 불확실할 경우 빚더미에 앉을 수도 있다.

또 리볼빙 서비스를 장기로 이용하면 그만큼 이자부담도 커진다. 현재 신용카드사들의 리볼빙 서비스 이자율은 연 8.8~26.9% 정도로 고객 신용도 및 이용실적에 따라 달라진다. 사실상 현금서비스 이자율과 비슷한 셈이다.

신용카드사도 마찬가지다. 신용카드사들은 리볼빙 서비스를 이용해 연체를 관리할 수 있고 이자수익도 늘릴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리스크 관리에 실패할 경우 경영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 채무상환 능력이 없는 고객일지라도 리볼빙 서비스를 이용하면 당장 연체는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잠재 부실 위험에도 불구하고 현재 신용카드사들의 리볼빙 서비스 잔액은 연체채권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신용카드사의 자산건전성 지표인 연체율에도 잡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금융전문가들은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 리볼빙 서비스가 신용카드사들의 자산건전성을 해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현재 신용카드사들의 연체율은 양호한 상태지만 하반기 경기가 안 좋아지면 부실화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잠재적 부실 요인인 리볼빙 서비스 확대는 자산건전성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3월 말 현재 신용카드사들의 연체율은 2.99%로 연체채권 규모는 2조원 정도다. 경기침체로 7조원에 육박하는 리볼빙 서비스 잔액에서 부실이 터질 경우 연체율이 껑충 뛸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신용카드사들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우수 고객 위주로 서비스하고 있고, 리스크 관리도 철저히 하고 있기 때문에 ‘리볼빙 서비스발 카드 불안’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반박이다.

신한카드 관계자는 “리볼빙 서비스로 인해 고객의 상환 부담이 가중될 수 있고, 이는 곧 회사의 잠재 부실 요인이 될 수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신용도에 따라 서비스하고 사후관리도 철저하기 때문에 부실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임상연 기자 sy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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